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오(文五). 할아버지는 진사 이명구(李命龜)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진일(李震一)이며, 어머니는 이담(李墰)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정자로 기용되었다. 여러 번 중앙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접산현감을 역임한 뒤, 송화현감(松禾縣監)으로 치적을 쌓아 거사비가 세워졌다. 그 뒤 1721년(경종 1)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집상 중에 시묘에서 차오르는 습기 때문에 병을 얻어 사지가 마비되어 벼슬에 나서지 않기로 마음 먹었으나, 결국 다시 복직하여 1735년(영조 11) 충청도사가 되고 이듬해 사헌부장령에 임명었으며, 1737년 결성현령이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린 결과 함행어사의 포상에 대한 장계가 있었다.
1740년 정언(正言)을 거쳐 사성이 되고 이어서 헌납을 지냈다. 1752년 집의가 되었다. 1755년 장릉(章陵)의 참봉이었을 때 손자가 화승(火繩)을 가지고 놀다가 장릉에 불을 낸 죄로 이봉령은 강진현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듬해 풀려 사간으로 복직되었다. 병이 점점 심해지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그 뒤 여러 번 소명이 있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56년(영조 32) 향년 67세로 하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