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희 ()

이봉희
이봉희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신흥강습소 교장, 서로군정서 학무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덕초(德初)
척서(尺西)
이칭
계동(啓東), 상훈(相勳), 상희(相熙), 경식(京植), 기동(基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8년(고종 5)
사망 연도
1937년
본관
고성(固城)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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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신흥강습소 교장, 서로군정서 학무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덕초(德初), 호는 척서(尺西). 일명 계동(啓東)·상훈(相勳)·상희(相熙)·경식(京植)·기동(基東). 경상북도 안동 출신.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도 뛰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5년 맏형인 이상룡(李相龍)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시도하였다. 그 뒤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국민계몽과 청소년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1911년 1월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유하현(柳河縣)에 설치된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5년 국내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후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참여하는 한편, 형 이상룡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0년 서간도 지역 외교원에 임명되어 중국정부와의 외교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화룡현(和龍縣) 태랍자(太拉子) 부근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1년 5월 액목현(額穆縣)에서 서로군정서를 재정비할 때 학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흑룡강성 탕원현(湯源縣) 오동하서(梧桐河西)에서 농토개척사업에 매진하였다. 1937년 1월 28일 하얼빈[哈爾濱] 취원창(聚源昶)에서 70세로 사망해 그 곳에 안장되었다가, 1990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상룡·이승화(李承和)·이광민(李光民) 등 재만독립운동가들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10월 13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안동독립사』(김을동, 명문사, 1985)
『석주유고』(이상룡,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
『국외용의조선인명부(國外容疑朝鮮人名簿)』(조선총독부경무국, 1934)
「중국 동삼성에 빛나는 항일구국의 혼」(이선우, 『순국』, 1991.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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