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제상으로는 상서성에 속하나 중서문하성의 총재(冢宰)가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하도록 되어 있어 상서성이나 중서문하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과 연결되는 행정체계를 이루었다.
982년(성종 1) 어사육관(御史六官)이 갖추어지면서 선관(選官)으로 설치되었다가, 995년 상서이부로 개편되었다. 문종 때 관제를 정비해 판사 1인, 상서(정3품) 1인, 지부사(知部事) 1인, 시랑(정4품) 1인, 낭중(정5품) 1인, 원외랑(정6품) 1인으로 구성되었다. 이속으로는 주사(主事) 2인, 영사(令史) 2인, 서령사(書令史) 2인, 기관(記官) 6인을 두었다. 속사(屬司)로 고공사(考功司)가 있어 관리들의 공과를 조사하였다.
이후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관제가 개편될 때 예부를 흡수해 전리사(典理司)로 되었다. 관속들도 상서가 판서로, 시랑이 총랑(摠郎)으로, 낭중이 정랑으로, 원외랑이 좌랑으로 각각 바뀌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해 관제를 개혁하면서 예부를 분리시키고 전조(銓曹)로 고쳤다. 이 때 상서·시랑·낭중·원외랑을 다시 두었으며, 판사와 지사는 폐지하였다. 같은 해에 충선왕이 퇴위하자 곧 전리사로 환원되었다.
1308년 충선왕의 복위와 함께 군부사(軍簿司 : 兵部)를 병합, 선부(選部)로 개편되었다. 관속도 전서(典書)·의랑(議郎)·직랑(直郎)·산랑(散郎)으로 고치고, 주부(注簿, 정7품) 2인을 새로 두었다.
그 뒤 다시 전리사로 고쳐졌다가 1356년(공민왕 5)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문종관제가 복구될 때 이부로 되었다. 1362년 또다시 전리사로, 1369년 선부로 되었고, 1372년 다시 전리사로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이조로 고쳐진 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