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에 왜군의 조선도공(陶工) 납치계획에 따라 사가(佐賀) 나베시마번(鍋島藩)에 의하여 1594년 또는 1596년경에 일본에 끌려가, 처음에는 가라쓰(唐津) 근방에 상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그에 의해서 시작된 가라쓰도자기이다. 그 뒤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아스미산(泉山)에서 백자광(白磁礦)을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되었다.
이삼평은 일가족 18명과 함께 이곳에 이사하여 도향(陶鄕)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고, 이후 30여년 안에 이곳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을 이루었다. 이때까지 아리타는 두메산골로 1590년대의 지도에는 지명이 전혀 나와 있지 않던 곳이었으나 1680년대의 지도에는 아리타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이삼평과 함께 납치되었던 도공은 155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리타명산(有田皿山)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이곳은 대도향(大陶鄕)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에도(江戶) 후기로 오면 이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일본 여러 지방의 자기 중 단연 제일로 손꼽히게 발전하였고 이마리항(港)을 통하여 널리 수출되었다.
아리타도자기의 특징은 아리타 내산제요(內山諸窯)와 외산제요(外山諸窯)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내산의 제요는 이삼평이 발견한 백자광 아스미산의 도석(陶石)과 시라카와산(白川山)의 유석(釉石)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삼평의 지휘 아래 번청(藩廳)이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주문에 의한 상등품의 제작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주로 개물류(蓋物類), 도발극상(兜鉢極上)의 침향호류(沈香壺類), 회석상(會席床)의 식기류, 세공(細工)의 향로류(香爐類) 등이 제작되었다.
초기 이마리는 단순한 조선식 백자이며, 고(古)이마리는 아리타 백자로 바뀐 일본 최초의 백자였다. 또, 아리타 외산제요는 지주나 상인들의 일상 식기류를 주로 구웠고, 제품의 대부분은 청자·청화백자·백자 등으로 서민적이다. 또한 대발류(大鉢類)로부터 유합(油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을 가진 것으로 초문(草文) 등을 그린 자유분방한 작품이 많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기계화의 근대화된 기법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현재 크고작은 백수십 개의 가마가 설치되어 최대의 도향으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
도조(陶祖) 이삼평의 기념비는 아리타마을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의 뒷산에 위치하여 아리타도업(有田陶業)의 장래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