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중길(仲吉). 아버지는 성천부사 이경천(李慶千)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태릉참봉에 제수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세력을 숙청할 때 소북파로 몰려, 삭직되어 10여년간 등용되지 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봉교(奉敎)가 되고, 이어 성균관전적에 승진되었으며, 봉상판관(奉常判官)·종묘령(宗廟令)·광흥수(廣興守)를 거쳐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에 호종하였다.
괴산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유효립(柳孝立)에 관계된 모역의 당을 잡아들인 공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오르고,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뒤 영암군수로 나갔다가 1632년 공조참의로 승진되었다.
그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은 육로가 막혀서 뱃길을 이용하였는데, 모두 가기를 꺼려하였지만 이선행만은 1년만에 다녀왔다. 이듬해 회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무사히 마쳤으나 그 고을 사람들의 탄원으로 유임되었으며, 암행어사의 보고에 1등으로 뽑혀 상작(賞爵)을 받았으나 임지에서 죽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