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온수감무(溫水監務)를 거쳐 수원사록(水原司錄)이 되었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죽계촌사(竹溪村舍)로 낙향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뒤에 천거되어 국자박사(國子博士)와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309년(충선 1) 좌사보(左思補)가 되었는데, 죽계촌사를 그리워 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다시 낙향하였다.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이성의 이름을 듣고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특진시켰으며, 뒤이어 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를 거쳐 선부의랑(選部議郎)이 되었다.
1314년(충숙 1) 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므로 민부전서(民部典書)로 올려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며, 뒤에 화평부사(化平府使)가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1325년(충숙 12) 3월 죽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오경사(五經笥: 五經에 능통한 사람을 말함)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