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수봉(秀峰). 호는 우문(又文).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활약한 뒤 1920년 친일파인 선천군 태산면장 김병탁(金炳鐸)을 총살한 의거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았으나 4년간 복역한 뒤 병을 이유로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무장항쟁을 펴면서 2차에 걸쳐 상해의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졌다. 1926년 박창세(朴昌世)·문일민(文一民)·강창제(姜昌濟)·이운환(李雲煥) 등과 같이 무장항쟁을 위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 박창세를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경위를 위한 외곽단체로 크게 기여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특무공작도 겸하여 일제의 앞잡이·밀정·공산도배·변절자를 숙청, 처단하였다.
1929년 1월 5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6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가입, 군인양성과 무술실력 배양에 진력하던 중 프랑스 조계(租界) 하비로(霞飛路)에 있는 백약방(百藥房)에서 옥성빈(玉成彬)을 만나러 갔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서울로 압송되어 복역중 형독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