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의숙(儀叔), 호는 화천(花川). 이후길(李後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장(李樟)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경익(李景翼)이며, 어머니는 남두수(南斗壽)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7년 지평을 제수받고 이어 정언·필선·헌납·사간·장령 등을 거쳐, 1760년 집의가 되었다. 이 때 왕세자의 서연에 민간의 학자를 출강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757년 경상도의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안핵사로 갔으며, 같은 해 역모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의 도민을 위무하기 위하여 홍봉한(洪鳳漢)의 추천으로 제주위유어사(濟州慰諭御史)로 갔다. 이 때 죄 없는 백성 수십명을 죽였다는 남살(濫殺)의 혐의를 입었으나 이듬해 혐의가 풀려 곧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강계부사가 되어서 삼폐(蔘弊)를 지적하고, 강계 은점의 세금을 호조에 납부하는 대신 강계부민에게 삼을 조달하는 비용으로 주도록 하였다.
1767년 동지정사(冬至正使) 전은군(全恩君)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조영순(趙榮順)을 탄핵하는 계를 정지시켰다가, 1773년 사직당하고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나 다시 승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