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훈(季薰). 연성군(蓮城君) 이지(李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강수(仁江守) 이양(李樑)이다. 아버지는 금계군(錦溪君) 이인수(李仁壽)이며, 어머니는 정인길(鄭仁吉)의 딸이다. 숙부 금평군(錦平君) 이의수(李義壽)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최립(崔岦)에게서 글을 익히고,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이어, 1618년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생원의 신분으로 성균관생 300명과 함께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간하다가 5년간 옥에 갇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1631년(인조 9) 의금부도사가 되고, 1635년(인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판교에 특진되고 이어 북청도호부판관으로 전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각 고을에 격문을 발하고 의병 3,000여명을 모집하여 남진하다가 영흥에 이르러 이미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파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