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원(慶源)이며, 자는 처인(處仁)이다. 이자연(李子淵)의 증손자이며, 문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정(李頲)의 손자이고, 병부낭중(兵部郎中) 이자효(李資孝)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선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오른 왕석(王錫)이고, 중서령(中書令) 이위(李瑋)의 딸과 혼인해 5남 4녀를 두었다.
1094년(선종 11) 5세 때 조음(祖蔭: 할아버지의 음덕)에 의해 호부서령사(戶部書令史)가 되었고, 1114년(예종 9)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에 보임된 뒤 경시서승(京市署丞)·시사재주부(試司宰注簿)를 거쳤다.
1124년(인종 2) 도압아(都押衙)로서 사신을 수행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곧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가 되어 참직(參職)에 올랐다. 1126년 외직으로 나가 원흥진장(元興鎭將)과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차례로 역임했고, 다시 경직(京職)에 들어 권지합문지후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상의봉어(尙衣奉御)를 차례로 거쳤다.
1134년 11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으로서 금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서경에서 묘청(妙淸)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군병마판관(前軍兵馬判官)이 되어 반란을 진압했고, 그 공으로 시어사 우사낭중(侍御史右司郎中)에 올랐다.
1138년 다시 외직으로 나가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지남경유수사(知南京留守事)로 옮겨 임기를 마친 뒤 이부낭중 겸 태자세마(吏部郎中兼太子洗馬)에 제수되었다.
그 뒤 시위위경(試衛尉卿)·형부상서 겸 선경부첨사(刑部尙書兼善慶府詹事)를 거쳐 1148년(의종 2) 3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11월 사책봉사(謝冊封使)로서 금나라에 다녀왔다. 1151년 7월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되었으나 같은 달 죽었다.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