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초명은 종신(宗臣). 자는 원량(元亮). 이정구(李廷龜)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이희조(李喜朝), 어머니는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가 되고, 1721년(경종 1)에 내시교관으로 보직을 받았으며, 1726년(영조 2)에 한성부주부에 승진되어 사복시주부와 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2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729년 부수찬으로 있을 때 정미환국으로 집권한 이광좌(李光佐) 등을 12항의 죄목을 열거하여 탄핵하였는데, 이 일로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원부로 옮긴 뒤 즉시 방면되었다.
1736년 북평사(北評事)로 임명되고, 1738년 사복시정 겸 한학교수로서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가 되었고, 예조참의를 지낸 뒤 삼화부사가 되어 재직중 죽었다. 저서로는 『대간공유고(大諫公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