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익지(益之), 호는 문원(文原)·죽촌(竹村)·수산(睡山). 서울 출신. 이조판서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당시의 대학자인 김양행(金亮行)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근사록』과 주서(朱書)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성리와 인물성에 대하여 분석하고, 이단으로 지목된 불경을 연구하여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 철학적인 가치는 인정되나 중생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판단하여 배척하였다.
역리(易理)를 연구하여 절서 형성의 원리인 기삼백도수(朞三百度數)를 풀이하여 오류를 시정하였고, 순자(荀子)의 성악설에 대하여 이유를 열거, 배척하였다. 1818년(순조 18) 가주서로 기용되어 학문의 능력을 인정받아 경연관과 서연관에 등용되었다.
이듬 해 시강원의 자의(諮議)를 지냈다. 학문이 깊고 지식이 해박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 『수산유고(睡山遺稿)』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