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 출신. 아버지는 이관호(李觀鎬)이며, 어머니는 김영(金永)이다.
1911년 봉성측량학원을 거쳐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감 후 안동성경학원에 입학, 교역자의 길을 택하였다. 졸업 후 안동지방의 농촌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