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11월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평생을 조국독립에 바칠 것을 안창호(安昌浩) 앞에서 맹세하였다.
임시정부 교통국의 국내교통연락원으로 임명된 뒤 국내간부로서 정의도(鄭義道) 등과 같이 비밀연락기관으로서 교통국을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국내와의 기밀문서와 군자금을 연락, 송달하였다.
또 동지와 함께 임시정부 발행의 신문과 주요문서를 국내에 비밀리에 배포, 선전하였으며, 군자금모금에 진력하면서 독립공채(獨立公債) 소화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해 말경 서울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부호의 가택을 출입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23년에 출옥하였다.
가석방 뒤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44년 12월 3일 서울 용산의 일본헌병대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수감되어 있다가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