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중(大仲), 호는 간정(艮庭).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손이며, 서성정(瑞城正) 이옹(李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율(李慄)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정필(李廷弼)이며, 어머니는 강극성(姜克誠)의 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기사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군량미의 부족을 말하자, 전쟁으로 백성들이 지쳐 있으니 소생할 때까지 세금을 가볍게 해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1597년 이후 춘추관검열·예문관봉교·시강원설서·승정원주서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 때 양사의 탄핵으로 파견이 지연되던 진주사(陳奏使) 유성룡(柳成龍)을 명나라로 급파할 것을 요청하였다. 1600년 병조좌랑·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을 역임했으며, 이어 교동현감이 되었다. 1603년 평안도암행어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영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때 경상도순검어사 유간(柳澗)으로부터 폐정을 개혁하고 문교(文敎)를 장려하며, 서리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빈민을 구휼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160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때 죽주산성을 견고하게 수축한 공로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1606년 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경연에 나가 『주역』을 진강하였다. 이듬 해 예조참의 등이 되고, 이어 승정원부승지로 지제교를 겸하였다. 군신 사이에 인망이 두터웠으며, 선조에게 자신을 반성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임금된 책임을 다하도록 요구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적극 지지하며 정권을 잡던 소북파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1820년(순조 20) 참판에 이어 정경(正卿)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간정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