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년(현종 7) 섭사헌대부(攝司憲大夫)가 되었고, 1019년 3월에는 우복야(右僕射)에, 7월에는 좌복야(左僕射)올랐으며, 1029년에는 왕가도(王可道)·황주량(黃周亮) 등과 개경의 나성(羅城) 축조에 종사하였다.
1031년(덕종 즉위년) 좌복야에 수사도(守司徒)가, 다음해에는 사도(司徒)가 더해졌다. 1036년(정종 2) 왕은 제(制)를 내려 “태위 상서좌복야(太尉尙書左僕射) 이응보가 연로하여 치사(致仕)하였으나 사직(社稷)을 보존한 공을 내가 감히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자손 가운데 관직이 없는 자에게 능력에 맞는 첫 관직을 제수하라.”라고 하였다.
이 조처는 거란의 침략 후 나성축조 등에 공헌한 것을 배려한 것이다. 1047년(문종 1) 상장군으로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하여졌다. 고려 초에 무신으로는 드물게 재상에 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