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거의 난 ()

목차
조선시대사
사건
1627년(인조 5) 이인거(?∼1627)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목차
정의
1627년(인조 5) 이인거(?∼1627)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내용

이인거는 본관이 영천이며, 교리를 지낸 추(樞)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북관(北關)을 떠돌다가 부모가 모두 죽자 그곳에 매장하였는데, 고향으로 반장(返葬 : 묘소를 되돌려 오는 것)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비탄하면서 횡성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

은거하면서도 행실이 괴벽하고 거짓을 꾸며 여러 차례 조정에 방자한 글을 투서하고 남몰래 반역할 뜻을 가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아 그가 은일자중한다고 여기고 오히려 현명함을 칭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는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으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이에 숨은 선비로 자처하며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면서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는 듯이 하였다. 특히, 인조반정 뒤 반정공신들이 정권을 잡고 정책을 펴가는 일들이 여러 사람들의 불만을 사게 되자 마침내 불측한 뜻을 품었다.

유희분(柳希奮) 형의 아들인 효립(孝立)이 제천에 귀양가 있으면서 대북파 중 살아남은 자와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킬 음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효립과 서로 내통하고 있었다.

1627년 9월 28일에 “신에게 정예한 군사 수천 명이 있으니 우선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들을 죽이고 전하의 측근에 있는 악한 무리들을 숙청해 전하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 소굴을 정벌, 국가의 수치를 씻게 해주십시오.”라는 소를 강원감사 최현(崔晛)에게 올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감사는 이를 패려한 잘못된 생각이라 여기고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10여명을 이끌고 횡성현에 와서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다.

이에 현감 이탁남(李擢男)이 현을 버리고 원주목(原州牧)으로 도망쳐 달려가니, 목사 홍보(洪○)가 놀라 고변을 조정에 알리고 군사를 동원해 요새를 지키게 하는 한편, 삼남 지방의 병사들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각 도 경계에서 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0월 2일 홍보가 원주의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진군해 치니, 인거와 세 아들이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저자에서 참형되었고, 동조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난이 평정된 뒤 상신 신흠(申欽)의 건의에 의해 홍보 등 4인이 소무공신(昭武功臣)에 책록되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
집필자
이장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