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인서(仁瑞), 호는 송계(松溪). 개국공신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의 6대손이며, 부호군(副護軍) 이순희(李淳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걸(李挺傑)이다. 아버지는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이옥(李沃)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희증(閔希曾)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42세로 늦게 사마시에 합격하고, 도화서별제(圖畫署別提)로 출사,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형조좌랑 등을 거쳐 1605년에 보은현감, 형조정랑을 거쳐 영덕현감이 되어서는 치적이 우수하여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여러 가지 실정이 계속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동교(東郊)의 송계(松溪)로 나가 거의 10년간 도성에 들어오지 않았다. 1623년(인조 1)의 인조반정과 함께 가평군수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아들 이중로(李重老)가 경기강원양도좌방어사(京畿江原兩道左防禦使)로 우방어사 이성부(李聖符)와 함께 적군을 예성강 상류의 마탄(馬灘)에서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니 크게 슬퍼하며 사직하였다.
후에 다시 군기시정(軍器寺正)·동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질이 강직하고 명분을 중히 여겨 권문세가에 몸을 굽히지 않았으며, 박순(朴淳)·유성룡(柳成龍) 등이 만나기를 청하였지만 그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았다.
만년에는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정작(鄭碏)·김상헌(金尙憲)과 친교를 맺었다. 1630년 81세로 우로(憂老: 연로함을 경하함)의 특전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었다. 좌찬성에 증직되고, 청릉군(靑陵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송계유고(松溪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