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에 설채한 축화(軸畵)로 크기는 97.9×56.4㎝이다. 심의(深衣: 높은 선비의 웃옷)에 복건(幅巾) 차림을 한 유풍(儒風)이 감도는 상용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이다. 화법상으로 볼 때 안면은 치밀한 육리문(肉理文)의 재현과 능숙한 훈염법(暈染法)의 사용을 보이고 있다.
일본 학자 구마가이(熊谷宣夫)는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이라는 논문 속에서 이 화상(畵像)의 필자를 채용신이라 보았다. 또한 이 상이 이재의 생존 시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사후 이재의 손자인 이채(李采, 1745·1820)의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기조로 하여 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채용신 가인(家人)의 진술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구마가이 자신은 이를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학설은 오주석의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그는 두 상을 생리학적, 병리학적으로 검토한 뒤 「이재 상」이 「이채 상」을 그린 10여 년 뒤에 이채의 노년기 모습을 그린 또 하나의 이채 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관식은 이에 반박하여 「이재 상」의 일부 용모에서 「이채 상」보다 10여년 더 젊게 표현되었음은 오주석의 주장이 모순됨을 의미하며 「이재 상」과 「이채 상」은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이재상의 제작 연대는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 있다. 확실히 이재 초상과 이채 초상을 비교해 보면 머리에 쓴 관모(冠帽)와 취세(取勢)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용모가 거의 흡사하여 다른 사람의 초상화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재가 살았던 18세기 전반에 보편화되었던 화법과 비교해서 이재상의 표현 기법에 매우 정묘한 음영이 들어 있으며 대(帶)에도 선명한 황록(黃綠)·자색(紫色) 등 양화계(洋畵系)의 색조가 현저히 눈에 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구 초상화 그 자체의 예술적 가치면에서는 안모(顔貌)의 정치한 필법과 옷주름의 간략한 필선의 대비 등 화면 구성상으로 볼 때 가히 일급이라고 일컬을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