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중봉(中鳳). 충청북도 제천 출신. 한말 이강년(李康秊) 의진(義陣) 소속의 의병장이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보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던 중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한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이 강행되었다. 이에 그 해 12월 예안(禮安)에서 이만응(李晩鷹)·금봉술(琴鳳述)·목사(牧使) 이만윤(李晩允)·진사(進士) 김수현(金壽鉉) 등과 거의(擧義)를 촉구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거의를 모색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광무황제(光武皇帝, 高宗)가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해산되어 해산된 군인이 의병대열에 참여해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전라남도 순창에서 양재건(梁在健)·이해수(李海秀)와 함께 거병하였다.
같은 해 7월 이강년 의진에 합류해 우군장(右軍將)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8월 충청북도 단양(丹陽)에서 일군과 싸우다 총상을 입고 들채에 실려왔다.
동년 9월 4일에는 총독장(總督將) 이만원(李萬源)·선봉장(先鋒將) 권용일(權用佾)과 함께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연풍(延豊)의 일본군을 공격해 4명을 사살하고 3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소모장(召募將)에 임명되어 흩어진 병사를 소모(召募)하면서 정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10월 상곡(上谷) 전투에서 총군 이달(李達) 등 10여 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종신유배형을 받고 고초를 겪다가 고종의 어명으로 석방되어 집에 돌아와 곧 서거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