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낙수(樂叟)이다. 1144년(인종 22)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황주서기·충주판관을 거치는 동안 청렴하고 정직하여 특히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이 일어나 문신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지방관리 때의 혜정(惠政)으로 말미암아 무사할 수 있었다. 무신정변 직후 상서우승에 발탁되었고, 1181년(명종 11) 우간의대부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1184년에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외직으로 나가 서해도안찰사와 서북면병마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1190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하였다.
많은 서적들을 널리 읽고 사부(詞賦)를 잘 지었으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였다. 1182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1190년에는 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조충(趙冲)·한광연(韓光衍)·이규보(李奎報)·유승단(兪升旦)·유충기(劉冲基) 등이 이지명의 문생들이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