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원(李淸源)은 1914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풍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학력은 초등교육이 전부다. 어려서는 기독교 신자였다. 최익한(崔益翰)의 사위이다.
193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막노동을 전전하며 노동운동에 참가하였다. 사회주의 활동가로 성장하여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일본공산청년동맹 등에서 간부로 활약하였다. 1933년부터 사회주의 입장에서 정세를 분석하는 글을 일본과 조선의 좌파 잡지에 실었다. 1934년 9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도사카 준 등이 주도한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유물론연구』 등 일본 매체와 『 동아일보』, 『 조선일보』 등 언론 매체에 한국사 연구 논저를 다수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세계사적 보편성에 입각하여 한국사에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강조하였으나, 점차 아시아적 특수성을 중시하여 한국사의 정체성과 타율성에 주목하는 쪽으로 변화하였다. 이청원은 조선학 운동을 ‘유교 훈화적, 정책적, 반봉건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식민 지배 체제에 기생하는 민족 부르주아지를 비판하고, 복고주의를 이에 기반한 파시즘이라고 규정하였다.
1936년 12월 「조선 경제의 현 단계」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등 한국인 유학생 운동을 지도하였다. 1938년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혁명론」에서는 민족 부르주아지를 비판하고 소비에트적 형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를 주장하였다. 1940년 5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형을 받았다. 전향서에는 통제경제론과 민족협화론를 주장하였다. 1944년 출옥 후 귀국하였다. 1945년 최익한의 딸 분경과 결혼하였다.
8‧15광복 직후 최익한과 더불어 장안파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후보위원에 포함되었다.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농업문제연구위원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 밖에 민족문화연구소 소원으로 이름을 올리는 등 좌파 진영의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1946년 월북하여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1947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기관지 『역사제문제』에 한국 근대사 논문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47년에 펴낸 『조선근대사연구』는 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1948년부터 2년간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조선당학교’에 유학하였다.
1952년 창설된 과학원에서 사회과학 부문 위원장을 맡았다. 1955년에는 과학원 역사학연구소 기관지 『력사과학』의 책임편집위원을 맡았다. 1955년 발표한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 민족 부르주아지와 연대를 경시한다고 비판받았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이후 연안계 지도자로서 숙청된 역사학자 최창익(崔昌益)의 일파로 몰려 교조주의, 수정주의라고 비판받았다. 1958년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936년 4월 일문으로 『조선사회사독본』을 펴냈다. 이 책은 고려시대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조선 후기까지를 아시아적 정체성에 빠진 사회로 그렸다. 여기에 근대사 부분을 덧붙여 이듬해 7월 『조선역사독본』을 펴냈다. 1936년 10월에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분석한 『조선독본』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