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경인(石田耕人). 아버지는 이규형(李奎亨)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김문기(金文基)의 딸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이다.
양녕대군의 증손인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가 창평으로 귀양왔다가 담양에 눌러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벼슬하지 말라는 조상의 가르침을 지켜 대대로 학문에만 힘썼다.
15세에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다. 1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2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35세에 증광시에 합격했으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해 필마로 돌아왔다.
38세 때에는 삼정(三政)에 관한 구언이 있자, 「삼정책」을 지어 올렸으나, 담양부사 때문에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병인양요 때는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에 도착하였다.
50세 때는 문과에 응시했으나 과거의 폐단을 보고 출사(出仕)를 단념하였다. 52세 때에는 호남에 기근이 들자 가산을 기울여 빈민을 구하였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 이기대(李箕大)의 딸인데 2남 2녀를 두었고, 평택임씨(平澤林氏)와의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었다.
이최선의 사상은 성리학적으로는 기정진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이최선은 기정진의 사상이 담긴 「외필(猥筆)」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필(讀猥筆)」을 써서 인간 본성 속의 이(理)를 절대적 가치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외세를 철저하게 배격해 척사위정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에서는 삼정의 문란은 지방 수령의 각성과 그 실천에 부족함이 있고, 근본적인 문제는 예의염치가 없는데 그 원인이 있으므로 양심의 회복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리설에 바탕해 척사위정을 실천한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의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전집(石田集)』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