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재 문하의 3처사로 불리며 향촌의 후진 양성에 힘쓴 학자.
이칭
공리(公履)
왕림(旺林)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800년(순조 즉위년)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정의
조선 후기에, 이재 문하의 3처사로 불리며 향촌의 후진 양성에 힘쓴 학자.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 세조 때의 명신 이석형(李石亨)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익위(翊衛) 이신로(李莘老)이다.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스승의 역책(易簀: 학덕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홀로 향촉(香燭)을 밝히고 마치 친아들같이 슬퍼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여 유문(遺文: 남긴 글)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의 문(門)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고 하였다.

성품은 마음이 크고 후덕하며, 강경하면서도 확고하여 한번 책을 잡으면 밤새껏 책을 읽었고, 특히『소학』 · 『논어』에 열중하여 늙을 때까지 학문을 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유자(儒者)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마침내 은신하여 오로지 내수(內修)에 정진하여, 시골의 수재들을 모아 사(社)를 세우고 이를 이끌어 나갔으니, 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왕림선생(旺林先生)이라 칭하였다.

정조 때 저사(儲嗣: 왕세자)를 세우고 경술(經術)의 선비를 구하매 많은 사람들의 추천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4년(정조 18) 나이가 많아 그를 경하하기 위한 배려로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824년(순조 24)에는 특별히 승정원승지로 추증되었다. 송단(宋湍) · 성덕명(成德明)과 함께 이재 문하의 3처사(三處士)로 불리었다.

참고문헌

『매산집(梅山集)』
집필자
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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