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 세조 때의 명신 이석형(李石亨)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익위(翊衛) 이신로(李莘老)이다.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스승의 역책(易簀: 학덕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홀로 향촉(香燭)을 밝히고 마치 친아들같이 슬퍼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여 유문(遺文: 남긴 글)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의 문(門)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고 하였다.
성품은 마음이 크고 후덕하며, 강경하면서도 확고하여 한번 책을 잡으면 밤새껏 책을 읽었고, 특히『소학』 · 『논어』에 열중하여 늙을 때까지 학문을 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유자(儒者)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마침내 은신하여 오로지 내수(內修)에 정진하여, 시골의 수재들을 모아 사(社)를 세우고 이를 이끌어 나갔으니, 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왕림선생(旺林先生)이라 칭하였다.
정조 때 저사(儲嗣: 왕세자)를 세우고 경술(經術)의 선비를 구하매 많은 사람들의 추천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4년(정조 18) 나이가 많아 그를 경하하기 위한 배려로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824년(순조 24)에는 특별히 승정원승지로 추증되었다. 송단(宋湍) · 성덕명(成德明)과 함께 이재 문하의 3처사(三處士)로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