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아찬(阿飡)이었다. 836년(희강왕 1) 흥덕왕이 죽은 뒤 왕의 사촌동생 김균정(金均貞)과, 사촌동생 김헌정(金憲貞)의 아들인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 김명(金明)·배훤백(裵萱伯)과 함께 제륭을 받들어 균정일파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제륭(僖康王)이 즉위하였다.
이 공으로 837년 정월 상대등이 된 김명의 뒤를 이어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838년 정월에는 상대등 김명을 도와 난을 일으켜 왕의 근신을 살해하니, 희강왕은 온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김명(閔哀王)이 즉위하였다.
그 해(민애왕 1) 12월에 균정의 즉위를 지지하였던 김양(金陽)과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군사를 빌려 공격하여왔다.
이에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로 하여금 막게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839년 정월에는 달벌(達伐 : 지금의 대구)에 도착한 적을 이찬(伊飡) 대흔(大昕), 대아찬 윤린(允璘)·의훈(疑勛) 등으로 하여금 막게 하였으나 또한 실패하여 김양의 군대에게 시해되었다.
그리하여 김우징(神武王)이 즉위하자, 이홍은 화를 두려워하여 처자를 버리고 산림으로 도망하였으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