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사연(士淵). 아버지는 군수 이응성(李應星)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장령(掌令) 허사흠(許思欽)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부터 대북세력이 왕대비(王大妃: 뒤에 仁穆大妃)의 폐출을 주장하자, 성균관의 논의를 주도하여 반대하는 소를 올리고 통문을 돌려 여론을 일으켰다.
또 동료 유생 정택뢰(鄭澤雷) 등과 더불어 상소하여,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이이첨(李爾瞻)의 처형을 주장하다가 삭고(削錮: 자격을 박탈당하고 투옥됨.)당하여 향리로 퇴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뀐 뒤 1624년(인조 2)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인조를 공주에까지 호종하였다. 이 공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로 옮겼다.
이후 경직(京職)으로는 감찰·의금부경력·군기시(軍器寺)와 사재감(司宰監)의 첨정, 형조정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양성·회인·옥천·양천·김포·고양의 수령을 거쳐 칠곡부사에까지 올랐다. 특히, 김포군수로 있을 때에는 방비를 엄하게 하여 병자호란에도 아무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원종한 공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