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성공하여 무신정권이 성립하였으나 집정무신들의 탐학으로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불만이 인걸의 난을 야기시켰다. 1227년 인걸은 용맹하고 굳세어 신기군(神騎軍)에 속하여 있었는데, 마침내 도둑의 괴수가 되어 남북을 약탈하였다.
하루는 개경 성안에 들어온 것을 나졸이 발견하여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최우가 기병 10여 명으로 수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 그는 도리어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이천사람 한위(韓瑋)의 고발로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죽음에 즈음하여 “나는 평생에 불의를 많이 저질러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아무런 후회가 없으나, 다만 6군(軍) 앞에 서서 적진에 출입하여 적의 장수를 목베고 군기를 빼앗아보지 못하고 남의 손에 죽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기에 익숙한 군인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협받았을 때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이 곧 난으로 나타난 것으로, 그가 난을 일으킨 또하나의 이유는, 무신란 이후 그와 같은 군인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한 데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