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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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왔을 때 태양의 일부 또는 전부가 보이지 않게 되는 자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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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일식은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왔을 때 태양의 일부 또는 전부가 보이지 않게 되는 자연현상이다. 태양이 가려지는 정도에 따라 부분일식·개기일식·금환일식의 세 종류로 분류된다. 태양은 제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일식은 제왕이 본래의 빛을 잃는 것과 통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일식은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열심히 관측되고 기록되었다. 일식은 규칙적으로 일어나며, 또 천문 계산에 의해 예측할 수 있음은 이미 11세기 초까지 확실히 알려져 있었다. 조선 후기까지 유교적 재이사상의 영향으로 일식을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여기는 풍조는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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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왔을 때 태양의 일부 또는 전부가 보이지 않게 되는 자연현상.
내용

그 가려지는 정도에 따라 부분일식 · 개기일식(皆旣日蝕) · 금환일식(金環日蝕)의 세 종류로 분류된다. 일식은 재이(災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져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열심히 관측되고 기록되었다.

또한 일식이 있을 때는 근신하고 반성하여 이 흉조가 실질적인 재앙을 가져오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재이사상에 의하면 모든 자연의 이상현상은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해석되었으며, 특히 일식은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태양은 제왕을 상징하고, 태양이 그 빛을 잃는 것은 곧 제왕이 그 본래의 빛을 잃는 것과 통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미 67건의 일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3건은 삼국 가운데 두 나라가 함께 기록해 둔 것으로 되어 있고, 또 1건은 실제로는 관측되지 않은 것이다.

『고려사』는 천문지(天文志) 첫머리에 고려시대의 일식을 모두 조사해서 기록하면서 공자(孔子)의 권위를 인용하고 있다.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일식이나 그 밖의 성변(星變)을 모두 기록한 것은 삼가하기[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은 고려 475년 동안 모두 132건의 일식이 있었다고 전한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역대의 일식 기록이 신라 29회, 고구려 11회, 백제 26회 등 삼국시대에 모두 66회의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 131회,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190회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 『고려사』에 남겨진 것들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은 불완전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는 일식 기록은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자세한 연구가 되어 있지는 않다. 삼국시대의 일식 기록에 관해서는 중요한 문제가 역사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역사가 김부식(金富軾)은 사료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일식 기록을 무조건 베껴 넣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6년 일본인 역사가에 의해 제기된 이 의심은 근래에 들어 부정되고 있다. 비록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를 보고 불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잘못 적은 것은 있겠지만, 대부분의 일식 기록은 근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첫 일식 기록은 기원전 54년(신라 혁거세 4) 4월 초하루의 것으로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고려 초 1세기 동안까지는 일식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11세기의 기록부터는 일식예보에 실패한 천문관이 처벌받는 경우도 보이고, 일식을 계기로 정치적인 토론이 벌어져 상소문이 올라가는 일도 있다. 고려시대 일식예보를 잘못한 죄로 천문관이 처벌받은 일은 1047년(문종 1)에 처음 있었고, 그 뒤 고려시대에 3회 더 일어났으며, 조선시대에도 처벌한 경우가 보인다.

이처럼 일식이 중요한 재이로 여겨졌기 때문에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이로 인한 재앙을 예방한다는 의미에서 궁중에서 구식의(救食儀)가 행해졌다. 『고려사』 예지(禮志)에는 이 의식이 적혀 있는데,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백관은 소복을 하고 북소리를 울렸다고도 한다. 또한 신하들은 검은 관에 소복을 차려 입고 시립(侍立)하면 왕이 역시 소복하고 들어와 재배하며 의식을 진행한 것으로도 적혀 있다.

일식은 규칙적으로 일어나며, 또 천문 계산에 의해 미리 예측할 수 있음은 이미 11세기 초까지 확실히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재이사상의 영향으로 일식을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여기는 풍조는 조선 후기까지 심각하게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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