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동환(東煥)·창식(昌植). 평양 출신. 1911년 일제 요인을 사살하기 위해 경술결사대(庚戌決死隊)를 조직하고 그 대장이 되어 서울로 왔다. 1912년 일제 경무부의 일본인 경부(警部) 니시카와[西川]를 사살한 뒤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4년 상해 동제의학원(同濟醫學院)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고 북만주로 이주,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투쟁을 조직화하였다. 1918년 독립군이 식량난으로 일본경찰에 적발되었기 때문에 군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용식품을 만들어려고 하였다. ‘알레이각(角)’과 ‘모컬리’가 적합함을 발견하고 제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조건이 구비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군부(義軍府) 러시아령 총대(總代)로 소항령(蘇項領)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 1개 대대를 훈련시켰다. 이들을 모아 원호회(原戶會)를 조직하고 사무장 겸 병무장(兵務長)에 취임하여 독립군을 계속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뒤 목단강(牧丹江)으로 가서 비밀공작을 전개하다가 안중근(安重根)의 숙부 안태건(安泰建) 등과 같이 하얼빈 일본헌병대에 잡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친일매국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의 거류민회(居留民會)를 습격, 투탄했으나 건물만 파괴시켰다.
1924년 무기를 반입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서울 청량리역에서 잡혀 3개월간 옥고를 겪고 3년간 주거 제한을 받았다. 1925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친일파숙청비밀책임자로서 활약하였다.
1929년 국민부에 가입, 활동하였다. 1936년 중화민국 정부 사회부 항일위원이 되었다. 1944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서무국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아 해외독립운동자와 그 가족 580여 명을 인솔하고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