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사진(士振). 아버지는 원주목사 임몽신(任夢臣)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583년 삼사의 탄핵을 받고, 이이를 변호한 성혼이 역시 탄핵을 받자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서 유생들과 함께 이에 항의 소를 올렸다. 이조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군사 모집의 임무를 띠고 경기·황해·강원도에서 병량(兵糧)을 거두었고, 이어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이 되었으며,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오자 내빈사(來賓使) 윤근수(尹根壽)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이들을 맞았다.
1593년 어가(御駕: 임금의 거둥 때의 어마와 그 행렬)를 호종(扈從)하였고, 도감랑(都監郎)이 되어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였다. 효성이 뛰어나서 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