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했다. 1925년 6월 ‘나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소년소녀웅변대회에 참가했으며, 1926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입학했다. 1930년 7월 순천유학생회 임원으로 전남지역에 수해가 발생하자 수해구제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 영문학을 전공하고 1936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조수(助手)를 지냈으며, 1936년 9월 잡지 『전남평론』을 주재했다. 해방 때까지 호수돈여고·경신여고·한성상업·배화여고·성신여학교 교사로 지냈다.
1931년 『동아일보』에 시 「우울(憂鬱)」과 「여름의 일순(一瞬)」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7년 8월 첫 시집 『석류(石榴)』(한성도서주식회사)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는 「견우」·「고요한 밤」·「근심」·「눈오는 날」·「파랑새」 등이 수록됐다. 1938년 9월 「가을 장미」·「소녀」·「벙어리」의 신추삼제(新秋三題)를 발표 했으며, 이해 10월 두 번째 시집 『팔도풍물시집(八道風物詩集)』(인문사), 1939년 1월 세 번째 시집 『후조(候鳥)』(한성도서주직회사)에 이어 1939년 3월 『현대영미시선 조선문고』(학예사), 1939년 9월 『전선시집(戰線詩集)』(인문사)을 간행했다. 『전선시집』은 황군(皇軍) 위문사로 북지전선(北支戰線)을 방문하여 이 경험을 시로 쓴 시집으로 김동인(金東仁)·박영희(朴英熙)과 함께 참여했다. 1939년 2월에는 최재서・임화・이태준 등과 함께 황군위문작가단(皇軍慰問作家團)을 발의할 때 참여했다. 이해 10월 문필보국(文筆報國)을 표방한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활동하면서 전선위문에 참가하는 등 친일 시와 글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동아일보』에 「실솔(蟋蟀)」·「어떠케 살을게냐」·「해방(解放)」·「싸홈」, 『자유신문』에 「새날을 맞음」·「3월 1일」 등을 발표했으며, ‘시인의 집’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8월 『세계단편선집』, 1948년 7월 『필부의 노래』를 출간했다. 서울여대에서 강의했고, 고려문화사 주간을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좌익계열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과 전향작가를 포함한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했다. 월북작가로 알려졌으나 가족 측의 증언에 따르면 납북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영어교수·외국어학장 등을 역임했다.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북한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힘썼다. 1982년 6월 21일 사망했다.
임학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24∼25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