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임만근(林萬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준(林畯)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이며, 어머니는 이진남(李震男)의 딸이다. 중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1년(광해군 3) 50세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나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다. 161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이듬해 정인홍의 무함으로 임서(林㥠)·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양산에 유배되고, 아들 임득붕(林得朋)은 곤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정랑에 복직되었으며, 군기시첨정을 거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신흠(申欽)의 추천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수축을 독려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일찍이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한 뒤 생모 이씨, 생부와 양부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으며, 1593년(선조 26)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