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

자동차
자동차
교통
물품
가솔린 · 경유 따위를 원료로 삼는 원동기를 장치해 그 동력으로 바퀴를 돌려 도로 위를 달리게 만든 이동수단.
정의
가솔린 · 경유 따위를 원료로 삼는 원동기를 장치해 그 동력으로 바퀴를 돌려 도로 위를 달리게 만든 이동수단.
연혁

자동차는 용도에 따라 승용차·버스·트럭·특수작업차 등으로 나눈다.

(1) 승용차

승용차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9년 당시 총리대신이 인력거를 탔다는 기록이 있고,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에서 1911년 미국산 포드형 승용차를 1대씩 구입하였다고 하므로 이 해에 처음 도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왕직에서 구입한 차는 고종이 탔는데, 윗덮개가 없고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큰 가솔린 승용차였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차는 미국산 캐딜락이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운전사는 윤권으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운전기술을 익힌 뒤 황실의 운전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무렵 상류층 사람들은 주로 인력거를 이용했고(1911년 현재 전국에 1,217대), 서울의 경우 서민들은 전차를 타고 다녔다.

19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승용차가 서울의 상류층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은 도로사정이 나빴던 데다가 한강 인도교 조차 없어서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도교 가설 이듬해(한강 첫 다리는 1917년 10월 7일 준공됨)인 1918년 212대로 불어난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승용차는 꾸준히 증가해 1926년 1,587대, 1931년 4,331대에 이르렀다. 한편, 각 지방도시에서는 1910년대 말부터 도로를 신설, 확장하는 사업을 크게 벌였다.

이에 따라 승용차도 기하급수적으로 보급되어 1919년에는 전국의 자동차가 4,535대로 불어났으며, 1945년에는 7,326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승용차는 관용·자가용·영업용·특수용 등으로 나누어졌다.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승용차는 크게 줄어 1951년의 경우 자가용이 787대, 관용이 633대였으나, 10년 뒤인 1961년에는 관용이 1,095대, 자가용이 1,925대로 불어났다.

한편, 1972년 3,063대였던 관용승용차는 1983년에는 5,812대가 되었다. 1987년 1월 말 기준으로 승용차는 전체 자동차의 50.8%인 67만 2493대에 이르렀다.

또한 외제자동차는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진 1987년 하반기부터 1989년 11월 사이 1,181대가 판매되었다. 서울의 경우 1989년 6월 말 기준 등록된 외제차량대수는 2397대였으며, 이는 1988년 말의 2,088대에 비해 14.8%나 늘어난 것이었다.

(2)영업용 승용차

영업용 승용차가 처음 운행된 것은 1912년이다. 운행자는 일본인 오리이[織居加一]였고(일본인 近藤와 한국인 李逢來라는 설도 있다.), 요금은 1시간에 5원이었으며 전화로 불러 이용했다.

당시의 요금은 매우 비싼 편이어서 일부 부유층이나 특수직업을 가진 사람이 탔다. 영업용 승용차를 오늘날처럼 ‘택시’라고 부른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매우 귀해서 승용차의 경적 소리만 나면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뛰어나올 정도였다. 자동차 경적이 클랙슨으로 바뀌기 전에는 바람이 찬 고무공을 꾹꾹 누르면 작은 나발에서 ‘뿡’ 하는 소리가 났다.

이무렵에 퍼진 「오줌 찔금 진고개, 방구 뿡뿡 자동차」라는 동요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승용차 속도는 매우 느려서 자동차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솔린 냄새를 맡으려고 어린아이들이 달음박질로 따라갈 정도였다.

택시운전사들은 제복을 입지 않고 양복을 입었는데 헌팅모자를 반드시 뒤로 돌려서 썼다. 이무렵에 차양이 뒤로 가도록 모자를 돌려서 쓴 사람은 야구 포수와 운전사 뿐이었다. 이것은 1921년 제작된 미국영화 「생지옥」의 주연배우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헌팅모자를 뒤로 젖혀 쓴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달리는 차의 스피드 감각을 더 잘 느끼게 해주었다.

택시는 점차 이용자가 늘고 대수도 증가하자 요금이 떨어져 1928년에는 서울시내 어디나 4인 기준 1원이었고, 한 사람이 느는 데에 따라 20전씩 더 받았다.

그러나 교외는 별도의 요금을 적용했다. 예컨대 망우리는 4원 50전, 신촌역과 청량리역은 2원, 우이동은 5원이었고, 인천이나 수원은 15원이었다. 한편, 대기요금은 30분에 2원을 받았다.

1931년에는 택시요금이 80전으로 내려갔다(당시 인력거의 하루 요금은 4원). 택시는 점점 불어나서 1947년 말 전국 81개 사업자가 1,090대의 면허를 받아 영업했으며, 이 가운데 54개 업자의 949대는 서울에서 운행되었다.

택시대수는 2년 뒤 1,312대로 늘었으나 당시의 업자들은 5∼10대의 차량을 가진 영세업자들로서 경험이 부족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특히, 1949년 4월 1일 운임규정이 고시되기까지 요금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한때 사라졌던 승합마차와 인력거가 다시 등장하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한국전쟁 직전 전국택시는 1,570대였으며, 이들은 모두 외국산이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국산차인 6기통의 세단형 ‘시발(始發)’차가 양산되면서 택시대수도 늘어났다. 1957년에는 322명의 업자가 3,864대를 보유(서울 1,576대)했다. 이무렵부터 택시에 요금표나 이정표를 비치, 문제점이 개선되어 대도시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서 위치를 점점 굳혀갔다.

1987년에는 전국의 택시가 4만 1200대로 늘었났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PATT 총회를 계기로 664대의 콜택시가 등장했으나 1988년 4월 15일 이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형택시가 나왔다. 또, 1985년부터는 일부 대도시에서 시간·거리 병산제도가 채택되었다.

한편, 서울시내의 경우 1950년대 초부터 합승택시가 운행되었다. 1957년에는 24개 노선에 900대가 움직였으며, 차량도 점차 대형화되어 1960년에는 9인승이 11인승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16인승의 마이크로버스가 나타났다.

이 합승택시가 차지하는 운송비율은 매우 높아서 1960년 기준 3,000여 대가 운행되었으며, 차체가 작아서 대형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비교적 좁은 도로에서도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3) 버스

버스는 사용목적에 따라서 정기수송용의 노선버스, 장거리고속버스, 관광용의 관광버스로 나뉘며, 이밖에 관청이나 학교 등에서 출퇴근에 쓰는 자가용버스, 정기버스 정거장에서 멀리 떨어진 인구조밀지역의 주민들이 스스로 운행하는 새마을버스도 있다.

노선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으로, 일본인 오쓰카[大塚金次郎]가 경상북도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에 이르는 부정기버스를 운행했다.

이어 1913년에서 1914년 사이 오리이 등에 의해 황해도 사리원에서 해주, 평안남도 평양에서 진남포, 진남포에서 광량만,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의주, 충청남도 천안에서 온양 및 공주에서 조치원·청주,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에서 상주 사이에 버스가 등장했다.

버스운행은 도로의 신설과 교통량 증가에 따라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1917년에는 업자 10명에 영업노선 1,000㎞를 넘어섰고, 5년 뒤에는 업자 154명에 1만㎞를 돌파했다. 1934년에는 233명에 3만여 ㎞로 확대되었으나 1940년경에는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 연료부족사태가 벌어져 업자 151명에 2만 5000여 ㎞로 줄어들었다. 1937년에는 연료를 카바이드로 대신한 버스도 나타났다.

한편, 이때까지의 버스는 대부분 중형이어서 승차정원이 35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40년대에 이르러 50명이 되는 대형버스가 등장했다. 서울의 버스운행은 1928년 부영(府營)버스가 나타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승합자동차’라는 이름이 오늘날의 ‘버스’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의 버스노선은 러시아워선과 임시운전선의 2개선으로, 러시아워선의 경우 서울역에서 시청을 거쳐 중앙청에 이르는 제1구와 중앙청에서 안국동·종로를 거쳐 을지로 3가로 돌아서 필동에 이르는 제2구에서 운행되었다(임시운전선은 4구간).

버스는 모두 30대로 12인승의 초미니 상자형이었으며 요금은 5전이었고, 그나마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 및 오후 5시에서 10시까지만 움직였다. 1929년에 들어와 요금은 전차요금과 같은 5전으로 내린 반면 버스는 50여 대로 늘었으며 노선도 9개 노선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문제점이 많아 1932년 운영권이 전차 운영회사인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넘어갔으며, 이에 따라 버스와 전차를 갈아탈 수 있는 승환제가 생겨났다.

관광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1년이다. 이 해 6월 22일부터 경성명소유람승합자동차(京城名所遊覽乘合自動車)가 운행된 것이 그것으로, 하루 오전 8시와 오후 1시에 두 번 떠났다. 14개소를 들르는 데 4시간이 소요되었고, 요금은 2원 20전이었으며, 버스는 16인승이었다.

1923년에는 서울과 양평 사이에 시외버스가 매일 운행되었고, 1928년에는 서울-인천간(1일 12회, 요금 95전), 1929년 1월부터 서울-원주간, 9월에는 서울-춘천간에 버스가 투입되었다.

1930년에는 서울과 포천 사이에 직통자동차가, 이듬해 3월부터는 서울-수원간에도 버스가 운행되었다. 광복 후 서울의 버스는 100여 대로 늘었으나 연료부족 등으로 운휴되기 일쑤였다.

1949년 8월 31일 처음으로 시내버스운수업자가 지정됨에 따라 105대가 움직였으며 연말에는 521대로 늘었다. 이때의 버스는 군용트럭을 개조한 것으로서, 뒤쪽에 붙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승객은 좌우 양쪽의 나무의자에 앉거나 중간에 서 있어야 했다.

한 노선의 예를 들면, 독립문에서 출발해 을지로 입구가 종점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버스운행은 점차 되살아나 1953년 말 전국의 버스는 2년 전보다 2배가 늘어난 1만 8000여 대에 이르렀다. 이듬해 3월 3,000여 대로 불어나면서 버스운송은 철도의 여객운송(4700만 명)을 능가하는(5500만 명) 실적을 올렸으며, 수입면에서도 철도(20억 환)보다 훨씬 앞질렀고(35억 환), 1957년에는 135명의 업자가 4,560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의 서울시내버스는 타고 내리는 문이 앞뒤 두 곳에 있었고, 남자 차장이 요금을 받았다. 뒤에 차장이 여성으로 바뀌면서 뒤쪽의 문은 가운데로 옮겨졌다. 그러나 1982년 자율버스제도가 시행되면서 부분적으로 안내양이 줄어들다가 1985년 말에는 완전히 없어지고 운전사가 요금을 받는 현재의 제도로 굳어졌다. 1984년 5월 말 기준 3만 2863대였던 전국의 버스는 이듬해에 11만 5000여 대로 급증했으며, 1987년 1월말에는 15만 6000여대가 되었다.

(4)화물자동차

화물자동차의 영업은 1926년부터 본궤도에 올랐다. 당시의 사업자는 45명이었고 연장노선은 3600㎞였다. 2년 뒤에는 1만㎞로 확장되었고(업자 129명) 1934년에는 2만 7500㎞(업자 234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버스의 경우처럼 화물자동차도 1940년에는 정기화물업자 23명에 영업노선은 4,800㎞로 축소되었고, 부정기화물은 업자 99명에 노선은 1만 8000여 ㎞였다. 광복이 되면서 생활필수품의 대도시 운반 등 화물자동차의 운송량이 대폭 늘었다.

이에 따라 1947년에는 178명의 업자가 2,551대의 트럭으로 126만 84t의 화물을 수송해 5억 2000여 원의 수입을 올렸다. 1950년 5월에는 242개업자가 3,130대의 트럭을 운행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트럭의 78%가 피해를 입었고, 나머지도 군용으로 징발되는 등 화물운송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휴전 무렵부터 징발차량이 해제되고 850대의 트럭이 수입되면서 화물운송업계는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54년 1월 15일 기준 전국의 화물트럭은 4,211대(업자 334명)였으나, 3년 뒤에는 2배에 가까운 8,713대(업자 401명)로 늘었다.

이후 화물자동차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1972년 2만 1161대이던 것이 1980년 6만 4140대, 1983년 7만 5655대, 1985년 41만대, 그리고 1987년에는 47만 5615대로 늘었으며, 1990년에는 87만여 대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1955년 시발자동차회사(始發自動車會社)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는 300대의 미국산 윌리스지프를 조립해 관용으로 납품한 것을 발판으로 이듬해부터 지프형의 ‘시발’차를 생산, 전국에 택시로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차 이름인 시발에는 이처럼 ‘첫걸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시발은 미군이 쓰던 지프의 부품과 4기통 엔진을 조립한 것으로, 1964년까지 3,000여 대를 생산했다.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최초의 자동차 공장은 재일동포인 박노정이 1962년 경기도 부천에 세운 새나라자동차공장으로서, 이 회사에서는 일본 닛산회사의 블루버드 승용차 400대분의 중간분해부품을 들여와 그 해 8월부터 ‘새나라’승용차를 조립, 판매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하동환(河東煥)자동차제작소(동아자동차회사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1963년에는 기아산업주식회사에서 세바퀴 화물자동차를 만들었다.

한편, 1963년에는 신진공업사가 미국산 불하품으로 승용차 ‘신성호(新星號)‘를 생산하다가 1965년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인수해 이듬해 신진자동차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조립한 코로나승용차를 선보였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회사는 이듬해부터 미국의 포드회사와 손잡고 코티나를 만들었으며, 아세아자동차회사는 1970년부터 피아트 124를 생산해 ‘신진‘·‘현대‘·‘아세아‘의 세 회사가 경쟁상태에 들어갔다.

이어 1974년 기아산업주식회사가 일본의 마쓰다회사와 협력해 브리사승용차를 제작했다. 이와 같은 자동차공업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국내수요가 늘어 호황을 누렸으나,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1980년 이른바 「2·28조치」를 발표, 승용차는 현대자동차회사와 새한자동차회사로 이원화하고, 기아산업주식회사는 소형버스와 트럭만을 생산하도록 규제했는데, 1982년 기준 승용차 9만 3451대, 버스 2만 931대, 트럭 4만 8279대가 출고되었다.

그러나 경기회복과 수출증대에 따라 1987년 이 조치가 해제되면서 현대자동차회사와 대우자동차회사(새한자동차회사는 1983년 대우자동차회사로 바뀜) 그리고 기아산업주식회사의 세 회사가 전차종을, 동아자동차회사는 지프와 특수장비차를, 아세아는 버스와 특수장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전국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 대를 돌파했고, 현대자동차회사의 포니 2가 캐나다에 처음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에는 같은 회사의 엑셀이 미국시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한편 이듬해에는 대우자동차회사의 르망, 기아자동차회사의 프라이드(해외에는 페스티바로 수출)가 미국시장에 진출했다.

1987년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130만 대에 이르렀고, 이 해에 50만여 대가 수출되어 한국은 자동차 선진공업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해마다 늘어난 자동차 등록대수는 1990년 6월 말 기준 자가용 266만 1565대, 영업용 29만 4207대, 관용 3만 2178대로 모두 298만 7950대에 이르게 되었다.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생활이 그만큼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에 못지 않은 부작용도 생겼다. 대도시의 교통체증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대기오염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통사고이다. 1965년부터 20년간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8만 1000명에 이르고, 1985년 한해 동안 사고건수 14만 6000건에 7,500명이 죽고 18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의 교통사고율은 세계에서도 상위 수준으로, 1982·1983년의 1만 대당 사고율은 미국이 125건에 2.7명 사망, 일본이 112건에 2명 사망, 영국이 146건에 3.3명 사망이었으나 우리는 무려 1,500건에 88명 사망이었다. 이와 같은 교통사고율은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긴요성에 관계없이 자동차를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심지어 자동차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자동차 보급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서울잡학사전』(조풍연, 정동출판사, 1989)
『서울600년사』 3·4·5(서울특별시, 1979·1981·1983)
집필자
김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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