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도량(藏經道場)은 경행(經行), 윤경회(輪經會),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등과 더불어 대장경 전체를 대상으로 예경하는 불교의 신앙의례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중국에서 장경이 수입되면서 장경도량이 개설되었는데, 고려 정종 때에 법제화되어 국가적 불교의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장경도량이 국가의식으로 성립됨과 동시에 각 사원의 전장(轉藏)의례로까지 확대되었다. 문종 때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 등이 송에서 윤장대(輪藏臺)를 도입하였는데, 경장(經藏) 시설인 대장당(大藏堂)이 사원마다 정비되고 전륜장(轉輪藏)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장경의 전독(轉讀)은 당대 최고 승계의 승려가 맡았고, 강경(講經)을 잘하는 고승이 장경도량을 주관하였다.
고려 전기인 1029년(현종 20) 무렵 『초조대장경』 편찬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장경도량을 왕궁의 회경전(會慶殿)에서 개최하고 구정(毬庭)에서 반승(飯僧: 승려들에게 식사를 베푸는 불교행사)을 행하였다. 천태종의 승려 교웅(敎雄)은 예종 때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의 초빙으로 큰 가뭄을 맞아 장경도량을 베풀었다. 장경도량은 정종 때 와서 법제화되었다. 1041년(정종 7) 봄과 가을의 두 계절에 장경도량이 열렸는데, 그 이전과는 달리 봄에는 6일간 열고 가을에는 7일간 여는 것을 예로 삼는다고 하였다. 원 간섭기에 이르면 주로 궁궐 내 전각과 왕실의 원당에서 장경도량이 베풀어졌다. 충렬왕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장경도량을 베풀었으며, 충선왕은 봄과 가을 모두 10일씩으로 고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불교가 억압을 받았던 조선시대에도 장경도량이 행해졌지만, 고려시대만큼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김부식이 지은 「전대장경도량소(轉大藏經道場疏)」, 정지상의 「전대장경소(轉大藏經疏)」, 이규보의 「대장경도량 음찬시(大藏經道場音讚詩)」와 「대장경도량소(大藏經道場疏)」, 최홍윤의 「대장경도량소(大藏經道場疏)」, 최자의 「선경전 행대장경도량 음찬시(宣慶殿行大藏經道場音讚詩)」, 권근의 「연복사행대장경피람소(演福寺行大藏經披覽疏)」는 장경도량과 관련된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