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익재(益哉), 호는 옥경헌(玉鏡軒). 거령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장개세(張蓋世)이고,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장담(張膽)이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시문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마쳤다.
54세 때인 1670년(현종 11)에는 흉년이 들어 민생이 어려워지자 조정에 「구페소(救弊疏)」를 올렸다. 상소를 통해 환상(還上 : 백성에게 빌려준 곡식을 가을에 받는 일) 제도를 본래의 구휼 목적에 맞게끔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선비들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역설했다.
만년에는 고향에 있는 고산(孤山)과 서호(西湖) 가에 불고정(不孤亭)과 옥경헌(玉鏡軒)이라는 정자를 짓고 검소하고 한가로운 삶을 살았다. 이때 삶을 소재로 삼아 전체 10수로 된 국문시가 연시조 「고산별곡(孤山別曲)」을 쓰기도 했다.
내용은 번거로운 세상사를 잊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와 술을 즐기며 지내는 작자의 멋스런 삶을 그렸다. 자연에 동화되려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또 이 작품의 서문을 보면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이나, 꽃 피고 술 익을 때에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부르게 하였다(月白風淸之夜/花開酒熟之時/使童子歌之)”는 언급이 있어 작품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에 실제로 아이들에게 가르쳐 노래로 부르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연시조 「고산별곡」 외에도 300여 수의 한시와, 10여 편의 글을 남겼다. 저서로는 그의 이러한 글들을 모은 『옥경헌유고』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