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원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청년단, 병인의용대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심원(沈元)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28년
출생지
평안북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청년단, 병인의용대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심원(沈元). 평안북도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군자금 모금원과 같이 간도로 들어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1년 5월 최재경(崔在京)·박일권(朴日權) 등 4명의 결사동지와 같이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고, 1922년 6월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800원을 모금하였다. 학업을 위하여 광둥[廣東]의 광둥대학[廣東大學]에 지원하였으나 배영운동(排英運動)이 격화되고 분규가 심하여 입학을 포기하였다.

입학을 포기한 뒤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지사들과 합류하였다. 1925년 12월 20일 최병선(崔炳善)·김광선(金光善) 등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다. 교포 박제건(朴齊乾)이 일본영사관 통역관 오다[小田]의 밀정이 되어 독립운동을 방해하자 동지 최병선·김광선 등과 같이 야채시장에서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1926년 4월 상해 소주하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조작미숙으로 실패하였고, 그 해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대대적인 민중시위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폭탄을 휴대하고 그 해 6월 1일 여객선을 타고 고국으로 향발하였다.

그러나 배 안에서 영국관헌에 잡혀 일본영사관에 인도됨으로써 거사 계획은 좌절되고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법정투쟁을 통하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광복투쟁의 선구자』(이현희, 동방도서, 1990)
『한민족광복투쟁사』(이현희, 정음문화사, 1989)
『독립운동사』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집필자
이현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