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심원(沈元). 평안북도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군자금 모금원과 같이 간도로 들어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1년 5월 최재경(崔在京)·박일권(朴日權) 등 4명의 결사동지와 같이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고, 1922년 6월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800원을 모금하였다. 학업을 위하여 광둥[廣東]의 광둥대학[廣東大學]에 지원하였으나 배영운동(排英運動)이 격화되고 분규가 심하여 입학을 포기하였다.
입학을 포기한 뒤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지사들과 합류하였다. 1925년 12월 20일 최병선(崔炳善)·김광선(金光善) 등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다. 교포 박제건(朴齊乾)이 일본영사관 통역관 오다[小田]의 밀정이 되어 독립운동을 방해하자 동지 최병선·김광선 등과 같이 야채시장에서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1926년 4월 상해 소주하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조작미숙으로 실패하였고, 그 해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대대적인 민중시위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폭탄을 휴대하고 그 해 6월 1일 여객선을 타고 고국으로 향발하였다.
그러나 배 안에서 영국관헌에 잡혀 일본영사관에 인도됨으로써 거사 계획은 좌절되고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법정투쟁을 통하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