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

근대사
단체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 지역에 결성된 재일조선인 노동운동단체.
정의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 지역에 결성된 재일조선인 노동운동단체.
연원

백무(白武), 안광천(安光泉), 이여성(李如星), 김상철(金相哲), 이헌(李憲) 등은 동경(東京) 소재 평문사(平文社)에서 조선노동공제회장 박장길(朴長吉), 공제회 이지영(李智英) 등과 협의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무산청년과 노동자의 대동단결을 도모할 목적으로 일본 내 통일기관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결성하기로 하고 이헌·김상철·이지영·박장길·김길섭(金吉燮)·지후근(池厚根), 김치(金治) 외 6명으로 준비회를 구성했다.

1925년 2월 22일 동경도(東京都) 나카다(高田) 소재 일화일선청년회관(日華日鮮靑年會館)에서 동경조선노동동맹회와 대판조선노동동맹회를 비롯한 12개 단체 대표 63명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대회가 열렸다.

결성대회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1.우리는 단결의 위력과 상호부조의 조직으로 경제적 평등과 지식의 계발을 기한다. 2. 우리는 단호한 용기와 유효한 전술로 자본가계급의 억압과 박해에 대해 철저히 항쟁할 것을 기한다. 3. 우리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노동조합의 실력으로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기한다’ 등 3개항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① 8시간 노동 및 1주간 48시간제의 실시, ② 최저임금의 설정 ③ 악법의 철폐 ④ 메이데이의 일치적 휴업 ⑤ 경제적 행동의 일치적 협력’을 주장으로 채택했다. 결성 직후 이 단체는 기관지 『조선노동』(월간)과 『노동독본』제1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일본 지역 조선인의 노동단체로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당시 최대의 과제를 앞에 둔 상황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로서만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활동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경제투쟁을 비롯한 반일반제투쟁으로 이루어졌다.

기능과 역할

활동 내용은 4대투쟁(3·1운동기념투쟁, 메이데이투쟁, 관동진재조선인학살추도회(關東震災朝鮮人虐殺追悼會), 국치일 기념투쟁,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 상애회 박멸운동으로 구성된 반일민족운동, 국내사회운동 지원, 일본 사회운동 참가, 조선인탄압 규탄운동, 노동운동 지도 등 5가지 대별할 수 있다.

이 단체는 결성 직후부터 해산 때까지 일관되게 4대 투쟁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수해이재민 구제운동, 고타루(小樽) 고등상업학교 군사훈련사건, 미에(三重)현 조선인학살사건, 니이카타(新潟縣)현 조선인학살사건 등 재일조선인에 대한 학살과 탄압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규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친일동화단체인 상애회(相愛會) 박멸 운동도 1925년 결성 이후 꾸준히 전개되었다. 상애회는 일본 경찰의 지원 아래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테러를 일삼았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비롯한 각종 조선인 사회운동단체를 습격하고 조선인노동쟁의를 파괴하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하면서 재일조선인을 억압하였다.

이 단체는 1927년 8월 3일효고(兵庫)현의 유마(有馬)전철제네스터를 지도하는 등 각지에서 전개되는 조선인노동쟁의를 지도, 응원하였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전개한 국내운동지원내용은 간도공산당 공판투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공판 지원과 광주학생운동, 원산총파업에 대한 지원을 들 수 있다.

이 단체가 전개한 반일민족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운동은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이다. 이 투쟁은 국내에서 자행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상이 요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즉 1925년 11월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공판에 따른 가혹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폐쇄사건 등 국내에서 벌어진 식민통치정책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은 1927년 6월 1일 대판에서 개최한 총독 실정(失政) 공격대회로부터 본격화되어 동경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일본 전 지역으로 확산된 이 투쟁은 1927년 9월 17일, 동경에 조선총독정치탄핵동맹이 결성됨으로서 일시적인 운동에 그치지 않고 상설운동으로 정착했다. 이 단체는 1925년 결성 이후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 재일조선인민족해방운동의 대중투쟁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변천

결성 당시 12개 단체 800여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한 이 단체는 그 해 10월에 1,220명의 조합원을 갖게 되었다. 1926년 초에는 관동과 관서(關西)의 두 연합회를 두고 활동을 전개했다. 1926년 9월에는 관동조선노동조합연합회 결의에 따라 동경 내 78개 노동조합을 중·서·남·북의 4개 노동조합으로 정리하고, 노동조합의 명칭을 지역 이름으로 대신하도록 했다.

또한 1927년 4월의 제3회 대회 이후에는 각지에 분산된 조합을 정리, 통합해 1 부현(府縣), 1 조합(組合) 원칙을 수립했다. 이 단체의 조합원수는 1926년 10월에는 9,900명, 1927년 4월에 3만 312명으로 증가했다. 1928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플랙션이 설치되었다. 이 단체는 1928년 검거로 인한 조직의 일시적인 와해상태를 거쳤으나 1929년에 결집력을 회복해 다수의 노동자를 조직화했다.

1929년 9월부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방침 변화에 따라 이 단체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해체운동은 김두용(金斗鎔)·김의석(李義錫)·김호영(金浩永) 등이 일본인 공산주의자와 긴밀한 협의 아래 주도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대표자회의 및 확대중앙집행위원회(1929년 12월 14일 개최)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해체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가맹할 것, 1산업 1조합주의에 따라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재조직하고 현 조합은 투쟁과정에서 점차 산업별 조직으로 변경할 것’ 등을 결의함에 따라 급속히 진행되었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체운동은 1930년 1월에 이르러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그 해 2월 1일경도(京都) 지부의 해체를 필두로 각 지부가 해체과정을 밟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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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활동에 대한 검토」(김인덕,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1996)
「1910-1920년대 동경한인노동단체(東京韓人勞動團體)」(정혜경, 『한국근현대사연구』1, 1995)
『在日朝鮮人運動史-8.15解放前』(朴慶植, 三一書房, 1979)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朴慶植 編, 三一書房, 1975)
『在日朝鮮人と日本勞動者階級』(岩村登志夫, 교창서방, 1972)
「在日本朝鮮勞働總同盟に關する一考察」(外村大, 『在日朝鮮人史硏究』18, 1988)
집필자
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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