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조선인친목회 ()

근대사
단체
1914년 일본 대판(大阪)에서 노동자 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던 재일조선인단체.
정의
1914년 일본 대판(大阪)에서 노동자 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던 재일조선인단체.
개설

일본 지역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재일조선인단체이다.

연원 및 변천

1914년 1월 15일에 강만형(姜万馨, 關西대학생)이 발기자가 되어 자신의 숙소에서 최진태(崔進泰), 김기준(金基俊), 정치현(鄭致鉉) 외 6명이 모여 임원선출과 회원 권유 등에 대해 협의를 한 이후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2월 25일에 해산해 더 이상 구체적인 활동은 없었다.

그 후 9월 1일에 정태신(鄭泰信)이 다시 발기해 미나미쿠(南區)에 있는 음식점에서 대판 거주 한인 35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한 이후 1916년 5월 말까지 14회 모임을 갖었다. 이 회는 처음에는 정태신이 총간사가 되어 회를 주재하고, 부남희(夫南熙), 신태균(申泰均) 등 두 명이 부간사로 보좌하였다.

1915년 1월 하순경 정태신이 상해(上海)로 떠나자 나경석(羅景錫)이 총간사를 대신 담당하고, 강만형, 이달빈(李達彬), 이화린(李化麟) 등과 함께 회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다시 나경석이 9월 중순에 귀국하면서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유학생이나 지식층보다 노동자대중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직종별 특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지도층은 정태신과 나경석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식층이자 대판거주조선인이 아니라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지도층이 갖는 이러한 특징은 한계로도 작용했다.

즉 정태신이 회를 떠난 후 다시 나경석이 귀국한 후 이 단체의 활동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능과 역할

단체의 성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명칭은 친목회이지만 단순한 친목 도모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또한 노동자구호를 목적으로 내걸었으나 구체적인 구호활동을 하거나 재원을 적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직 기구를 갖추고 1년에 6회 이상의 모임을 갖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단체 지도층의 교류관계를 통해 결성 목적을 살펴보면 친목도모나 노동자 구호(救護)보다는 노동자 규합이 더 큰 목적이었다.

즉 직종과 계층을 망라한 조선인 향우회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므로 입회 조건의 제한이나 부담 없이 모일 수 있었고 이는 곧 조선인을 규합함에 있어 커다란 장점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재판조선인친목회는 두 가지 점에서 재일조선인운동사에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정태신이나 나경석 등 단체 지도층이 노동자 대중의 실상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이후 사회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 조선인노동자들은 이 단체를 통해 다른 계층이나 직종의 노동자와 교류가 가능했고, 조선인의 민족 공동체를 인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단체는 대판조선인운동사의 모태가 됨과 동시에 정태신과 나경석이 이후 소련과 중국, 조선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대판(大阪)한인단체의 성격(1914-1922)』(정혜경, 한일관계사연구회4, 1995)
『재일조선인사연표(在日朝鮮人史年表)』(강철, 웅산각, 1983)
『戰後 大阪の朝鮮人運動』(梁永厚, 朝鮮近代史硏究雙書, 未來社, 1994)
집필자
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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