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박은식(朴殷植)·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나창헌(羅昌憲)·강창제(姜昌濟)·엄항섭(嚴恒燮)·조동호(趙東祜)·이유필(李裕弼)·박창세(朴昌世) 등 20여 명이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조직하였다.
조직 목적은 일제의 완전 타도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일체의 공격이나 파괴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할 것임을 임시정부 전체 수호인의 이름으로 표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북경의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는 위임통치를 주장하면서 이를 실천하려고 하였던 이승만(李承晩)을 성토, 규탄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위임통치건에 대해 좀더 진상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 대처하기로 하고, 그 실행소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나창헌, 엄항섭을 비롯한 5명을 선발하였다. 한때 이들은 일명 '정구단(正救團)'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1925년 이후 이들은 정위단(正衛團)을 상해에서 조직하고 전의회와 합류하였다. 전의회는 인적 보강과 물질적 충실을 기약한 뒤에 인원이 50여 명으로 늘어나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해에 거주하는 한국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최대 목표로 삼고 투쟁하였다.
이들은 하수인을 시켜 상해 프랑스 조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일본상해총영사관을 출입, 위장 귀순하게 하여 일본의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한때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과도 손을 잡고 무장투쟁 대열에 동참한 일도 있었다.
그 후 다시 독자적인 회(會) 운영으로 복귀해 순수한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친지로 회원을 정비하였다. 임시정부 지원의 외곽단체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때까지 과감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진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