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회령에서 소학교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상경 윤백남(尹白南)프로덕션에 신인배우로 입사, 이경손(李慶孫) 감독의 「개척자」에 데뷔작으로 출연했다. 윤백남프로덕션이 해체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중화학원(中華學院)과 우창대학(武昌大學)을 졸업했다. 1929년 영화감독 이경손, 배우 정기탁(鄭基鐸), 촬영기사 한창섭(韓昌燮) 등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이들과 함께 1931년 영화 「양자강(揚子江)」을 제작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았으며, 남양영편공사(南陽影片公司)에서 제작, 중국에서 인기를 얻었고, 국내에서도 수입, 공개되었다. 1932년까지 천일공사(天一公司)·대중화영편공사(大中華影片公司)·고성공사(孤星公司) 등에서 제작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또는 배우로 활동했다. 1934년 2월 한국문학의 해외소개, 각국 문학의 연구 및 국내 문단에 소개, 한국문학의 공동연구, 재중 문인의 상호 연락을 목적으로 하는 재중국조선인문예협회(在中國朝鮮人文藝協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중일전쟁 발발로 1937년 9월 귀국할 때까지 상하이 영화계에서 「대지의 비극」·「초악 初惡」·「춘시 春屍」 등의 영화를 감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국한 후 고향에 머물다가 1938년 고려영화사에서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주연을 맡은 「복지만리(福地萬里)」 제작에 들어가 1941년에 개봉했다. 이 작품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한 영화로, 만주 현지 로케이션을 한 대작이며 그의 영화 작가적 명성을 높여주었으나, 이 작품으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잡혀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39년부터 연극에 관심을 갖고 연극단체 고협을 창설했으며, 이를 기반으로「청춘무성」·「노처녀기」·「비」·「주부경제학」·「부엉이 우는 마을」 등을 연출했다. 1942년 천창근(泉昌根)으로 창씨했으며, 1943년 7월 김태진과 함께 극단 태양(太陽)을 창설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양자강」을 연극무대에 올렸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조선연극동맹을 결성할 때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9년 3월 서울시 문화위원회 영화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부산에서 상록극회(常綠劇會)를 창립하는 등 연극활동을 벌였는데, 주로 각본과 연출 또는 극단대표를 맡았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각본·감독 또는 주연으로 활동하면서 「단종애사(端宗哀史)」(1956)·「마의태자」(1956)·「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삼일독립운동」(1959)·「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 등을 제작했다. 1973년 1월 19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