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4월 득도한 뒤 이듬해 6월부터 포교에 힘써서 경상도일대는 물론 충청도 · 경기도 일부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각 처의 교인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오게 되었다.
그러나 관의 감시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우수한 교인을 접주로 임명하여 교인들의 관리와 교화를 담당하게 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것이 접주제로서 전도인(傳道人)과 수도인(受道人)의 인맥을 단위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같은 지역에 살고 있더라도 접주는 다른 경우가 있었다.
최제우의 생존시기에는 16명의 접주가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시대에 이르러 교세가 삼남일대는 물론 강원 · 경기지방까지 크게 확장되게 되자 접소 대신 포제(包制)라는 대단위의 속인제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포제가 실시된 것은 1879년경이며, 포의 책임자를 대접주(大接主), 그 밑에는 일개 군을 담당하는 수접주(首接主), 면을 담당한 접주, 이동(里洞)을 담당하는 접사(接司) 등을 두어 통괄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1884년부터는 교화를 전담하는 교직자를 정하여 교장(敎長) · 교수(敎授) · 도집(都執) · 집강(執綱) · 대정(大正) · 중정(中正) 등의 여섯으로 분류하는 육임제(六任制)가 시행되었다. 동학운동은 속인제의 접주제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공식화될 수 없었던 조직을 보존하게 되어 각 세포조직을 통하여 지속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
신도 상호간의 인간관계가 바탕이 된 이 조직형태는 교단의 기밀을 보존하고 조직의 연대감을 돈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수십 만의 교도들을 소집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다. 이런 조직력은 보은집회 · 광화문복합상소운동 · 갑오동학혁명에 기본적인 추진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1905년 12월 1일,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서울에 중앙총부, 지방에는 각 교구가 설치되었고 교인과의 연락이 행정적으로 처리되는 기관제(機關制)가 행하여지게 되었다.
이로써 접주제는 소멸되었으나 접주제의 속인제적 전통은 연원제(淵源制)로 흡수되고, 기관제와 연원제의 이원조직체계가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원제의 전신은 연비제(聯臂制)로서 전도인을 천주(薦主), 수도인을 피천인(被薦人)이라 하였는데, 천주를 연비인(聯臂人)이라 부른 데서 비롯된다.
연원집단의 규모는 교세의 성쇠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현재는 1961년 4월 전국대회에서 정해진 것으로 교호(敎戶) 200호 이상에 도정(道正) 1명, 교호 100호 이상에 도훈(道訓) 1명, 교호 50호 이상에 교훈(敎訓) 1명, 교호 25호 이상에 신훈(信訓) 1명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