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은 군인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군의 정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된 병과이다. 1948년 9월 15일, 이화여자고등학교(梨花女子高等學校) 교목(校牧) 정달빈(鄭達彬)이 해군 중위로 임관(任官)하여 해군에서 군종 업무를 시작하였다. 1950년 12월 4일, 해군본부에 군목실(軍牧室)이 설치되었고, 1951년 2월 7일에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軍僧課)가 설치되었으며, 1952년 3월 30일에 공군 군종 제도가 시작되었다. 1968년 9월 불교, 2007년 7월 원불교(圓佛敎)에서 군종제도에 참여하였다.
1948년 9월 15일, 해군 초대 주1 손원일(孫元一)의 초청으로 이화여자고등학교 주2 정달빈이 해군 중위로 주3 군종 업무를 시작하였다. 정달빈은 해군 정훈실(政訓室)에서 약 3개월 동안 비공식적으로 군종 업무를 수행한 후 1949년 1월, 주4 장교로 임명되었다. 1949년 2월 5일, 정달빈과 육군 장교, 해군 장교 그리고 그 가족 등 15명의 개신교 신자가 용산 군인 교회로 명명된 한국 최초의 군인 교회에서 해군 군종 사상 첫 예배를 드렸다. 용산 군인 교회는 타군의 장병과 그 가족에게도 개방되어 육 · 해 · 공군 군종 업무의 모체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군종 업무는 중단되었고, 6월 27일에 미8군 군종이며 천주교 평양 교구장 서리인 몬시뇰 캐럴(George Carroll)과 미 북감리교 목사 쇼(William E. Shaw)가 일본으로 가서 미 극동사령부 군종 베넷(Ivan L. Bennett)과 신부 단(J. Dahn)을 만나 한국에 진주하는 미군에 군종으로 참여할 것을 논의하였다.
1950년 9월 5일, 캐럴과 쇼는 대통령을 방문하여 군종 제도를 설명하였고, 9월 13일에는 미 주5을 방문하여 한국군에 군종 제도를 도입하면 미군처럼 군종에게 계급을 부여해야 한다는 합의를 하였다. 9월 18일, 한국 그리스도교계는 한국 군종 제도 창설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한국전쟁이 주6 주7이므로 정신적 계몽이 필요하고 유엔군처럼 신앙의 무장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군종 제도 도입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9월 25일, 캐럴과 쇼는 다시 대통령을 방문하여 옷과 식량 등의 주8은 군에서 담당하고, 군종 경비는 각 주9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군종 제도 창설을 승인받았다. 군종의 신분은 현역 군인보다는 주10이 더 바람직하다는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문관으로 결정되었다.
1950년 12월 21일, 각 부대에 군종 초빙 명령이 내려지고,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가 설치되었다. 2월 28일, 개신교 목사 28명과 천주교 신부 11명이 제1기 군종으로 입대하여, 4주간의 훈련을 받고 무보수 주11 문관으로 임관되어 전후방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육군 군종 제도의 창설이었다. 1951년 4월 14일, 군승과는 군목과(軍牧課)로 개칭되었다. 1952년 6월 16일, 육군 군종들은 ‘유급 문관’으로 신분이 변경되었는데 민간 교회의 경력에 따라 2급 4호부터 3급 8호로의 대우를 받았다. 한국천주교회는 1952년 1월 19일, ‘종군신부 전교사업 대구 후원회’를 결성하여 천주교 군종 활동을 후원하였다.
한편, 1950년 12월 4일에 해군본부에 국군 최초로 군목실이 설치되고, 12월 6일에 주12 손원일이 주13으로 임명한 목사 추인봉이 해군 군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2년 2월 10일, 육군 군종 신부와 군종 목사에 의해 공군에서의 군종 활동이 시작되었고, 그해 3월 30일에 공군 군종 신부와 군종 목사가 임관하여 공군 군종 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953년 4월 3일 공군 본부에 군목실이 설치되었다. 1954년 1월 12일, 육군본부 인사국 군목과가 군종감실(軍宗監室)로 개칭, 승격되었고, 그해 12월 13일에 문관 신분의 군종들에게 현역 계급이 부여되었다.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천주교 군종 활동이 침체하였는데, 본당 신부의 수가 부족하여 많은 군종 신부들이 전역하였기 때문이었다. 1958년 3월, 한국 천주교회는 군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육 · 해 · 공군을 통합한 가톨릭 군종 신부단을 창단하였다. 1959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韓國天主敎主敎會議)는 매년 1월의 첫째 주일을 ‘군목 사업 주일’로 제정하였다. 그러나 군종 제도 창설 10주년인 1961년, 군종 활동 중인 군종은 육군에 군종 목사 277명과 군종 신부 3명, 해군에 군종 목사 26명과 군종 신부 3명, 공군에 군종 목사 17명과 군종 신부 3명을 기록하였다. 1964년, 주교 회의는 교구 내 한국인 신부 10%의 군종 신부 파견을 결정하였고, 1968년에 주교 회의는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군인 주일로 제정하였다. 1970년 1월 13일, 군 선교에 대한 범 교회적인 협조 체제 확립을 목적으로 가톨릭 군종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65년 9월부터 주14에 군종 목사와 군종 신부가 파견되어 1973년 3월까지 군종 활동 및 대민 지원 활동을 하였다. 1952년부터 군종 참여를 도모하였던 불교는 주15 중인 1968년 9월, 군승 요원 5명이 선발되어 10주간 교육을 수료한 후 임관하여 군종 제도에 참여하였다. 1972년부터는 육 · 해 · 공군 그리고 해병대 등 각 군에서 독자적으로 수행하였던 군종 업무를 국방부(國防部)에서 통합, 운영하였다.
1977년, 군종 신부단은 군종대목구로 승격되었고, 1989년 10월 23일에 한국 군종 교구가 설립되었다. 1970년 9월, 국회에 군종 참여 청원서를 제출한 원불교는 2007년 7월 1일, 원불교 주16 1명이 군종 장교로 임관하여 원불교의 군종 제도 참여가 본격 시작되었다.
현행 한국의 군종은 종교 자유, 주17, 종교 차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고, 그런 면에서 주18을 의심 받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 신학의 평화주의적 전환 추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거나 동떨어져 있으며, 여러 형태의 종교 평화 운동과도 불화를 빚고 있다. 군인들을 위한 ‘도덕 옹호자’ 역할보다 전투력 제고를 위한 ‘사기 증진자’ 역할에 머물러 있고, 전쟁의 도덕성이나 군 내 동성애자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윤리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부적절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국가적 · 종교적으로 바람직한 군종 활동이 무엇인가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