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을(金商乙)은 1918년 7월 12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판교면(板橋面) 취동리(聚洞里)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東京)전수대학 전문부 경제과에서 공부하였고, 1938년 1월 도쿄에서 대한독립군 공작원과 접선하였다. 1939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원에게 초모(招募)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 · 중 연합으로 일본군과 전투하기 위해 결성 직후 중국군 제10전구(戰區) 사령부가 있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였고, 중국군 제34집단군(集團軍) 호종남(胡宗南) 사령관과 교섭하여 1940년 3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신설하여 4월부터 훈련을 시작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주된 활동은 중국 항전에 대한 협조 외에 초모 활동이었고, 그를 위한 교육도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청년훈련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을 전방으로 파견하기 전에 재교육하는 시설이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의 활발한 초모 활동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 수는 결성 1년여 만에 30여 명에서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김상을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고, 1945년 제2지대와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함께 추진한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에 참여하였다. 제2지대 대원 125명 중 50명이 선발되어 제1기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훈련은 첩보 공작에 중점을 두었으며, ‘첩보훈련반’과 ‘통신반’으로 구분되었다. 훈련 과목은 첩보 및 통신교육, 일본군 전투서열, 심리전술, 독도법 등 다양하였다. 특히 무전 기술의 습득을 위한 통신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7월 말 제1기생 훈련이 종결되었고, 8월 4일 38명이 수료하였다.
독수리작전의 원래 계획안은 1945년 초여름쯤 5개 전략 지점(서울 · 부산 · 평양 · 신의주 · 청진)에 대원들을 침투시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독수리작전은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통보 이후 목적이 변경되었고, 한국광복군은 8월 11일 지청천(池靑天, 이명 이청천)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 정진군(挺進軍)을 편성하였다. 제1지구(평안도 · 황해도 · 경기도), 제2지구(충청도 · 전라도), 제3지구(함경도 · 강원도 · 경상도) 등 3개 지구로 나누고 8월 20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 잠입한다는 계획이었다. OSS 훈련을 수료한 김상을은 노능서(魯能瑞, 이명 서준철), 신국빈(申國彬)과 함께 전라도반 제1조에 속하여 국내 침투를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진입 작전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