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곤은 중국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거쳐 1935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을 졸업하고,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회 비서처 비서, 선전부 선편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면서 제1지대 본부 부관주임 겸 본부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승곤(金勝坤)은 1915년 1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담양읍(潭陽邑) 객사리(容舍里) 100에서 태어났다.
1933년 5월 6일 담양을 출발하여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정의은(鄭義恩)의 인솔로 7명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이동하였고, 중국 상하이를 거쳐 9월 13일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에 도착하였다. 1932년 9월 김원봉(金元鳳)이 난징에 개교한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제2기에 입교하여 훈련받았다.
1934년 2월 난징에서 70리(약 27.5㎞) 거리인 강녕진(江寧鎭)에 찾아온 김구(金九)와 안공근(安公根)이 한인군관학교 설립에 협조를 요청하였고, 그해 9월 김원봉의 지시로 김승곤 등 15명의 의열단 학생들이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 제2총대 제4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 일명 한인특별반에 90여 명과 함께 입교하여 1935년 4월 9일 62명이 졸업하였다. 한인특별반은 일본 영사관의 강력한 항의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고, 김승곤 등 제1기 졸업생들은 1935년 4월 중순경 뤄양을 떠나 난징에 도착하였다.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조선)의열단 등이 모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당하자 석문룡(石文龍) · 최성장(崔成章) · 하동진(河東振)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특무부(特務部) 간부가 되어 일본 밀정을 조사 보고하는 등 비밀 정보 활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였고, 그해 12월 초 조선의용대 제1구대를 이끌고 창사〔長沙〕의 중국 제9전구 지역에 도착하여 제1차 창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제1구대는 중국의 31집단군 92군 21사단 121연대와 122연대에서 2년간 활동하다가 1939년 유격구(遊擊區)가 생겨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어 구호와 문서 번역 등의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하였다.
1941년 4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회 비서처 비서로 선임되었고, 1942년 11월 장교와 사병들의 복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총사령부에서 설립한 ‘ 한국광복군 관병소비합작사(官兵消費合作社)’의 사원으로 2주 800원을 소유하였는데, 사원 대부분이 2주를 소유하였다. 1943년 3월 30일 임시정부 비서처 비서로 선임되어 그해 7월 6일까지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20일 이영수(李英秀)와 함께 임시정부 선전부 선편과(宣編科) 과원으로 임명되어 그해 7월 6일까지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고, 김승곤은 제1지대 본부 부관주임 겸 본부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를 강화하기 위해 김승곤과 조지영(趙志英) · 이병훈(李秉勳) · 진가명(陳嘉明) · 왕영재(王英哉) · 진춘호(陳春浩) · 여정순(呂正淳) · 호건(胡建) · 김빈(金斌) 등 9명의 한국광복군 대원을 증파하기로 하였으나, 중국군사위원회는 김승곤과 조지영‧이병훈‧진희명 등의 여권 발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6월 총사령부 정훈처 선전과에서 근무하였고, 1945년 8월 9일 밤 일본 투항을 알게 되었다. 한국광복군 후속 조치를 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1977)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