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원으로 인도와 버마(지금의 미얀마) 국경지대인 임팔 전선에 투입되어 대일 전쟁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으로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자 제5지대 대원이 되었다. 1943년 8월 영국군과 한영군사상호협정이 체결되어 인도·버마(지금의 미얀마) 지역에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자 인면전구공작대 대원으로 임팔 지역에서 대일 전쟁에 참가하였다.
김상준(金尙俊)은 1916년 12월 10일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농소면(農所面) 용암리(龍岩里)에서 태어났다.
1939년 10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 · 중 연합으로 일본군과 전투하기 위해 결성 직후 중국군 제10전구(戰區) 사령부가 있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였고, 중국군 제34집단군(集團軍) 호종남(胡宗南) 사령관과 교섭하여 1940년 3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신설하여 4월부터 훈련을 시작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주된 활동은 중국 항전에 대한 협조 외에 초모(招募) 활동이었고, 그를 위한 교육도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청년훈련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을 전방으로 파견하기 전에 재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훈련 중인 1940년 5월 김상준 등 8명의 대원이 제34집단군 태항산(太行山)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일본군 점령 지역 내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 제36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노안(潞安)을 비롯하여 신향(新鄕) · 초작(焦作) · 수무(修武) · 장치(長治) 등지에서 초모 활동을 전개하여 노안에서만도 60여 명의 인원을 초모하였다 초모된 인원들은 전지공작대 본부가 있는 시안으로 후송하였다. 김상준도 이들의 초모 활동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團拜式)이 끝난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시안의 본부에서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면서 김상준은 제5지대원이 되었다. 그런데 1942년 3월 1일 3 · 1절 기념식 후 제5지대 본부에서 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동료 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나월환 암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만인 1942년 4월 1일 제5지대는 기존의 제1, 2지대와 통합되면서 제2지대로 편성되었다.
1943년 3월 김상준은 한국독립당의 5개 구(區) 중 24명으로 구성된 제3구에 속하였고, 매주 금요일 19시에 주회(周回)를 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 · 재건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이 통합되어 창당된 정당이다. 통합 과정부터 건군 문제를 검토하고 계획하여 광복군 편성을 한국독립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의 하나로 결정하였다. 1943년 10월 16일 김상준은 분열된 한국독립당 통일을 위해 김자동(金紫東) · 유동열(柳東說) · 채원개(蔡元凱) 등 16명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3년 6월 영국군과 한영군사상호협정이 체결되어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 · 버마(지금의 미얀마) 지역에 참여하게 되자, 그해 8월에 결성된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에 참여하였다. 인면전구공작대는 한지성(韓志成)을 대장으로 김상준과 김성호(金成浩) · 나동규(羅東奎) · 문응국(文應國) · 박영진(朴永晋) · 송철(宋哲) · 왕현덕(王現德) · 최봉진(崔俸鎭, 이명 최상철) 등 9명으로 결성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3주간 교육을 받은 후 1943년 8월 29일 인도 콜카타(Kolkata)로 파견되었다.
인도에 도착한 후 9월 15일부터 약 3개월 동안 영어와 방송 기술을 배웠고, 김상준 등 6명은 1944년 1월 8일 브야크로 이동하여 2개 분대로 나뉘어 영국군에 배속되었다. 이때 김상준은 나동규 · 문응국과 함께 201전지선전대에 배속되었다. 김상준과 나동규 · 문응국은 1944년 2월 5일 브야크를 떠나 7일 브라마푸트라강(Brahmaputra R.)을 건너 2월 12일 임팔(Impal)에 도착하였다.
임팔은 영국군 제4군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었고, 임팔을 중심으로 한 인도 · 버마 국경지대는 1943년 3월 9일부터 7월 15일 일본군이 총퇴각할 때까지 영국군과 일본군의 대접전이 벌어진 전선이었다. 임팔대회전(Battle of Impal)에 투입된 김상준과 나동규 · 문응국은 3월 11일 티딤(Tedim) 마을의 가장 앞에 있는 전선에 도착하였는데, 다음 날 오후부터 대포와 기관총 소리가 난무하였고, 사단본부의 긴급명령에 따라 산 위로 철퇴하였다.
같은 해 3월 13일 김상준과 나동규 · 문응국은 인도 · 영국 병사들과 함께 참호를 파고, 밤에는 파수도 보며 결사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4일 긴급명령으로 다시 철퇴하였고, 3월 31일부터 일본군이 있는 200m까지 근접한 지점에서 대적선전방송을 시작한 김성호 · 박영진 · 한지성과 합류하여 임팔(Imphal) 부근의 격전지들에서 특수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5월까지 임팔 지역에서만 30여 회에 걸친 대적선무방송과 10여 건의 포로 심문, 문서 번역 등의 특수공작을 수행하였다.
비센푸르(Bishenpur) · 캉글라통비(Kanglatongbi) · 우크룰(Ukhrul) 등지에서도 1943년 4월 하순부터 6월 초까지 대적방송 등을 전개하여 영국군의 작전을 원조하였다. 김상준 등 9명의 인면전구공작대는 1945년 9월 10일 콜카타에서 중국 충칭으로 귀환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