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섭(羅泰燮)은 1901년 12월 16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문산면(文山面) 원성리(遠星里) 576번지에서 나관혁과 김관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3월 서울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안악군 용문면(龍門面) 매화리(梅花里)의 매화동본당(梅花洞本堂)에 우도(Paul Oudot, 吳保祿, 1865~1913) 신부가 종교 교육과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설립한 봉삼학교(奉三學校)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최익형(崔益馨)과 함께 안악 · 신천(信川) · 재령(載寧)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할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자 1927년 5월 국내를 떠나 7월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고, 그해 8월 한인특별반 운영을 총괄하는 김구(金九)와 교육 훈련을 주관하는 지청천(池靑天) 간 불화로 24명과 함께 한인특별반에서 퇴교하였다. 이어 김구의 주선으로 한인특별반을 퇴교한 13명과 함께 난징〔南京〕에 있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기생으로 입학하여 1936년 6월 졸업하였다.
1935년 1월 안공근(安恭根) 등 30여 명과 난징에서 특무대(特務隊) 발대식에 참석하였다. 1935년 11월 항저우〔杭州〕에서 창단된 한국국민당의 산하 청년 단체로 1936년 7월 11일 난징에서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대일 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 활동, 친일 인사 및 일본인 정보원들에 대한 암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11월 10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의원으로 보궐 선출되었는데, 당시 중국군 장교로 복무 중이어서 임시의정원 의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1938년 7월 1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겸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39년 10월 1일 임시정부 군사특파원으로 선임되어 조성환(曹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충칭〔重慶〕을 출발하여 시안〔西安〕에 도착하였다. 시안성〔西安城〕 통제방(通濟坊)에 판사처(辦事處)를 설치하고 군사 거점 확보, 화베이〔華北〕 지역 거주 한인 대상 선전 활동으로 한국광복군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사특파단은 1940년 11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시안판사처가 설치되면서 해체되었다. 고시복(高時福, 일명 고일명), 공진원(公震遠, 이명 고진기) · 유해준(兪海濬) · 이욕해(李慾海) · 지달수(池達洙)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창설 간부로 임명되었다.
1941년 2월 공진원 · 유해준 · 지달수 등과 함께 중국군 제12전구의 협조를 받으며 쑤이위안성〔綏遠省〕 포두(包頭)를 중심으로 허베이성〔河北省〕의 북평(北平) · 천진(天津) · 당산(唐山) 지역과 장가구(張家口)에 이르는 지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전 및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2월 24일 고시복 · 이지일(李志一) · 조지영(趙志英)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군무부의 부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 3월 30일 군무부 총무과 과장, 1944년 2월 8일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었다. 1944년 6월 1일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설치한 생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945년 7월 황학수(黃學秀) · 이상만(李象萬) · 이복원(李復源) · 민필호(閔弼鎬)와 함께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9월 화중한교선무단(華中韓僑宣撫團)에서 활동하면서 화중 지역 한인들의 생명 보호와 안전한 귀국, 구호 활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5월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