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원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학은(鶴隱)
이칭
고운기(高雲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사망 연도
1943년
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고운기(高雲起). 호는 학은(鶴隱). 아버지는 공창준(公昌準))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북만주로 가서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1930년 7월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고, 이 당에서 조직한 한국독립군 소대장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932년 12월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의 명령으로 강진해(姜鎭海)·심만호(沈萬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군의 대표로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총사령관 왕더린[王德林]과 합작을 협의하러 닝안[寧安]에 갔으며, 제14사단장 차이스룽[蔡世榮]과 합의하여 한중연합전선을 폈으나 중국군의 배신으로 연합작전은 깨어졌다.

1933년 9월 둥닝현[東寧縣] 전투에서 패퇴한 뒤, 11월 임시정부의 광복군 기간장교 훈련 책임자인 지청천을 따라 조경한(趙擎韓)·오광선(吳光鮮)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갔다. 이곳에서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의 한국인 특설반에 입학, 정치·군사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1935년 상해에서 지청천·황학수(黃學秀) 등과 한국독립당을 신한독립당으로 개편하는 데 참여하였고, 신한독립당은 다시 의열단,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38년 9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여 대장에 취임한 뒤, 황학수와 함께 내몽고로 가서 일본의 군사 기밀을 탐지하는 등 공작을 전개하였고,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39년 10월 쓰촨성[四川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었고, 1940년 2월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어 충칭[重慶]에서 복무하였다. 11월 다시 시안[西安]에서 3개 지대로 편성될 때, 제2지대장 겸 징모2분처(徵募二分處)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나태섭(羅泰燮)·고시복(高時福)·유해준(兪海濬)·지달수(池達洙)·이욕해(李慾海) 등을 이끌고 쑤이위안성[綏遠省]의 바오터우[包頭]를 근거지로 전방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한국 교포가 많은 허베이[河北] 지방의 장자커우[張家口] 등에 침투해 청년들을 포섭하고 비밀 지하조직망을 구축하였다. 1942년 9월 부대 개편으로 시안에 복귀하였고, 10월 총사령부의 충칭 이전에 따라 함께 옮겨갔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독립운동사』 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집필자
박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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