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철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 결사단,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및 일제 고관 처단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3년(고종 30)
사망 연도
1977년
출생지
충청남도 서산
관련 사건
3·1운동|독립단 서산지단사건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 결사단,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및 일제 고관 처단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남도 서산 출신. 1918년 4월경 대한독립단원으로서 군자금을 모금해 해외지사에 송금하던 이종성(李鍾聲)과 알게 되어,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서산군 일대의 유지들에게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8월경 서산과 안면도를 근거지로 안면면·태안면·부석면·남면 등 4개면의 유지 4명을 포섭해 서산지단, 일명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에는 안면도 승언리 소재 사립 광영학교장(廣英學校長) 이종헌(李鍾憲)이 취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서산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 해 4월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충청도 책임자 권인채(權忍采)와 서울에서 만나 활동 계획을 협의한 뒤, 8월 16일 임시정부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9월 서산지단원 임정호(林楨鎬)를 권인채에 소개해 임시정부에 가도록 주선하고, 사재 120원을 여비로 주었다. 1920년 초 서산군 인지면 야당리의 부호 박준용(朴準用)의 집에 들러 독립운동자금 1,000원을 요구, 현금 200원을 수령하여 영수증을 교부하고, 나머지는 후일 송금할 것을 약속받았다.

1920년 5월 서울 인의동에 있는 전기봉(全基奉)의 집에서 김상옥(金相玉)·김동부(金東浮) 등과 암살단을 조직, 조선 독립에 방해가 되는 친일분자를 없애고 민중을 봉기시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그 해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0명의 내한을 기회로 출영나온 총독부 요인을 암살할 계획을 김상옥과 진행시켰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해 10월 28일 독립단 서산지단사건으로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10월 다시 암살단사건으로 붙잡혀 1922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10·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朝鮮獨立運動』 1 分冊(金正明 編, 原書房, 1967)
집필자
박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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