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백낙흥(白樂興)의 아들이다.
1900년 평양 숭실중학교 2년을 수료하고, 이듬해 평양부 우통대(右統隊)에서 하사관교육을 받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04년 캐나다 그리스도대학 건축학과 3년을 마치고 귀국하여 함경도에서 선교사 및 건축기술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이듬해 국내에 들어와 평양의 김승호(金承鎬)·오원선(吳元善)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청구하는 등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나섰다. 또 동지 정찬조(鄭燦朝)·고창희(高昌熙) 등과 더불어 『독립신문』 등을 전국 각처에 배부하였다.
1920년 5월 10일에는 정찬조·고창희 등과 폭발물을 이용, 평안남도 도청 및 평양경찰서 폭파방법을 밀의하던 중 일본경찰의 기습으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평양지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27년 4월 가출옥되었다.
1944년 평안남도 대동군 신궁방화음모사건(神宮放火陰謀事件)에 가담하였고, 1945년 2월 평양의 일본군사시설파괴를 모의하다가 다시 발각되어 피신하고 있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