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모세. 서울 출신. 민제호(閔濟鎬)의 아들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망명하는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 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주관하는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를 졸업하고, 이어 원동중학교(遠東中學校)·만국항해전문학교(萬國航海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상해화풍수선회사(上海和豊輸船會社)에서 선장으로 있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1940년 5월 참전해 한커우[漢口]와 난징[南京] 간의 중국 군대 및 군수품 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창사[長沙]에 가서 항일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광저우[廣州]에서 항일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1943년 1월 일본군이 광저우를 공격하자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이끌고 류저우[柳州]로 갔다. 그 곳에서 항일가극단을 조직해 일제의 침략 만행을 폭로, 항쟁의식을 고취하면서 한·중민(韓中民) 친선 도모에 힘썼다. 이 해 9월 독립운동가 가족을 이끌고 가서 쓰촨성[四川省]에 안주시키고,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3년 10월 김구(金九) 및 지청천(池靑天)의 지령으로 김학규(金學奎)·이준식(李俊植)·조시원(趙時元) 등과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시안판사처[西安辦事處]를 설치하고 전방 각 지대(支隊)를 후원하였다.
잡지 『광복(光復)』을 발간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취지 및 활동상황, 광복군의 전투상황 등을 게재하여 항일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1945년 2월 임시정부 재무부 경리국장, 광복군총사령부 상교참모(上校參謀)로 임명되어 활약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뒤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총무처장으로 활약하다가, 1947년 6월 교포 1,000여 명을 인솔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해군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하고 해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